[광화문에서/윤신영]‘王用三驅’와 실험동물 복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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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왕이 사냥을 할 때 (사냥감을) 세 방향에서만 몰고 한 방향을 터주니, 사냥감을 놓쳐도 사람들이 눈치 보지 않는다(王用三驅失前禽邑人不誡·왕용삼구실전금읍인불계).’ 주역 비(比) 괘 다섯 번째 효의 문구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흔히 ‘어진 왕은 백성으로 하여금 왕을 지나치게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고 풀이한다. 즉, 엄격하면서도 아량이 넘치는 모습으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건 글의 뒷부분에 초점을 맞춘 해석이다. 앞부분에 좀 더 초점을 맞추면 ‘어진 왕은 사냥을 하더라도 사냥감에게 도망갈 여지를 준다’고 풀이한다. 역시 정치가의 너그러운 품성에 주목하는 해석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모두 관심사가 사냥하는 왕이나 백성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이 문구에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는데, 바로 쫓기고 있는 사냥감인 동물이다. 오늘날의 동물 복지론자라면 이 문구를 새롭게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인간의 편익을 위한 활동에 의해 위험에 빠진 동물일지라도, 적어도 살아남을 권리는 있다. 동물에게 그 정도 권리는 보호해 주는 게 사람의 의무다’라고.

1만 년 넘게 축적된 문명의 힘을 지닌 인류가 동물을 마음껏 사냥하는 일쯤은 이제 일도 아니다. 주역이 탄생한 기원전에도 이미 ‘어진 왕의 조건은 사냥감이 도망칠 길 하나는 터주는 것’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오죽할까. 절대강자인 인간이 자연 상태의 동식물을 보호하자는 이야기는 식상하므로 새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애매한 상황이 있다.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위한 의약 실험에 동물을 쓰는 경우다. 동물을 보호하면 좋긴 한데, 동물 실험을 통해 그 약의 안전성과 효과를 평가해야만 인간에게 이롭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고, 여러 윤리학자와 과학자가 대안을 연구하고 있다.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횟수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방법도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인도적인’ 방식으로 한다는 구체적인 원칙(일명 ‘3R 원칙’)도 1950년대 말에 나왔다. 국내에서도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지금은 여러 제도적 장치와 기술적 대안이 마련된 상태다. 현재 국내에서 시판되는 화장품은 개발 과정에서 동물 실험을 거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인체의 조직 세포 등을 배양해 독성을 평가하는 식으로 동물 실험을 대체했으며, 여기에는 화장품 회사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노력도 큰 기여를 했다.

화장품까지는 그럭저럭 합의에 이르렀지만, 의약 분야는 다르다. 새로운 약물의 효능도 실험해야 하니 동물을 쓰지 않기가 좀 더 어렵다. 하지만 이 역시 조금씩 기술적 대안이 나오고 있다. 줄기세포를 분화해 인간의 장기 세포를 만들어 실험을 하거나 컴퓨터로 약의 효능을 예측하는 기술 등이 개발되고 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여러 인도적 개선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인권 감수성이 향상됐기에 가능했다. 제도적, 법적 개선은 이런 의식의 변화를 현실로 만들었다. 하지만 변화를 현실로 만드는 기술적 진전이 없었다면 그 여정은 훨씬 지난했을 것이다. 실험동물의 복지 역시 마찬가지다. 동물 복지와 관련한 연구는 직접 돈이 되지 않고 신약 개발 자체처럼 큰 주목을 받지도 않는다. 이 분야는 화려한 분야가 아니다. 그렇지만 연구자들이 ‘왕용삼구’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실현할 수 있다면, 우리를 좀 더 인간적일 수 있게 하는 대가는 싸지지 않을까.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
#왕용삼구#실험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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