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더티 디젤게이트’의 손익계산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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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산업부장
천광암 산업부장
독일의 한 여론조사업체가 몇 달 전 독일인 1000명에게 ‘어떤 사람(또는 사물)이 독일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요한 볼프강 괴테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응답은 폴크스바겐이었다.

폴크스바겐은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로 자사뿐 아니라 독일차 브랜드 전반에 깊은 흠집을 남겼다. 소비자들의 불신은 폴크스바겐을 넘어 ‘클린(Clean) 디젤’의 기치(旗幟)를 들어온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등으로도 확산되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디젤게이트’가 현대·기아차에 반사이익을 안길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긴 안목으로 봤을 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 정부가 폴크스바겐 비리를 발표한 당일, 미국에서는 자동차산업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빅뉴스가 언론을 탔다. 애플이 전기차 시장 참여를 사실상 공식화한 것이다. 애플이 약 600명의 연구진을 고용해 전기차 개발을 해온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기는 했지만, ‘애플 카’의 출시 시기를 2019년으로 못 박는 등 본격 출사표를 냈다는 점에서 종전과는 양상이 바뀌었다.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전기자동차의 점유율은 1% 미만으로 아직 미미하다. 하지만 충전 문제 등 결정적인 약점들이 빠른 속도로 극복되고, 높은 연료소비효율과 싼 유지비라는 강점은 더욱 강화되고 있어 전기차 시장이 곧 고속 성장기에 접어들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전기차 분야의 선두주자인 테슬라는 지난해 1월 자사 제품으로 미국 대륙을 4일 만에 횡단하는 이벤트를 연출했다. 랠리팀은 테슬라가 미국 전역에 설치한 무료태양광초고속충전소만을 이용해 ‘장거리 주행+연료비 제로+배출가스 제로’가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에너지혁명 2030’의 저자인 토니 세바는 테슬라 등의 사례를 들어 2025년경에는 내연기관 자동차들이, 필름회사 코닥이 디지털카메라에 밀려 겪었던 것과 같은 순간을 맞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은 전기차 기반시설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관련 기업들이나 구매자들에게 파격적인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다. 전 세계 자동차회사들이 갖고 있는 현금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현금을 갖고 있으면서, 브랜드에 대한 광적인 충성고객까지 확보하고 있는 애플까지 전기차 진영에 가세한다면 기존 자동차업체들이 맞아야 할 ‘코닥의 순간’은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요란한 악대(樂隊)를 앞세운 행렬에 마차와 사람이 몰리는 밴드왜건(Band Wagon) 효과 때문이다. 디젤게이트는 전기차에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이 밴드왜건 효과를 극대화할 것이다.

지금까지 현대·기아차는 수소연료전지차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왔다. 유럽 시장을 잡기 위해 ‘클린 디젤’에도 많은 투자를 했다. 반면 전기차 투자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현대·기아차가 내놓은 양산 전기차는 기아의 쏘울EV와 레이EV뿐이다. 다만 최근에는 전기차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를 바꿔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모두 내년에 준중형급 전기차를 출시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한국 정부는 2020년까지 전기차 20만 대를 보급한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놨지만, 올해 상반기(1∼6월) 한국 시장의 전기차 출하대수는 823대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중국에 비하면 1.1%에 불과한 수치다. 말만 앞서고 실행이 뒤따르지 않은 결과다. 한국이 전기차 분야에서의 부진을 만회하려면 제조업체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들도 전국적인 충전망 구축과 초기 수요 견인에 하루빨리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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