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민경]옷과 그녀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여성 정치인과 여성 기업인 등 우리나라 ‘여성 리더’들의 옷 입기(dressing)는 한때 나의 주요 관심사였다. ‘옷과 그녀들’에 대해 공부도 하고 글도 썼는데, 지금은 재미가 없어져서 관두려는 찰나다. 왜일까. 우선 언론에 등장하는 여성 정치인이 확 줄었다. 게다가 ‘여성 리더의 옷은 연설과 같다’는 게 통설인데 여성 정치인들의 옷은 반세기 전 ‘직장 유니폼’으로 돌아간 듯 똑같아졌다. 여성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그런데 달아난 흥미를 돌아오게 한 여성들을 만났다. 그녀들은 대개 기업의 임원 혹은 경영자들로서 정말 깜짝 놀랄 만큼 멋진 차림이었다. 그녀들의 옷은 유행에 대한 감각을 보여주었고 날카로운 하이힐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들의 옷은 매우 여성적이었다.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이 대표는 최근 서울시내 면세점 운영권 경쟁을 진두지휘하면서 바지와 운동화를 선택하는 대신에 우아한 발렌티노의 옷에 스틸레토 힐, 흰색 동백꽃 코르사주로 여성적 리더십을 강조했다. 평가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대표의 옷차림은 여성 고객이 많은 면세점의 이미지와 잘 맞았고 독과점에 대한 일반의 반감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 대표보다 더 인상적인 이들은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회사로 인식돼 온 제조업체의 여성 임원들이었다. 오너 가족이 아닌 여성 임원 자체가 드문 데다 공식 행사에서 만난 그녀들은 패션지에서(사실은 공장에서) 막 나온 듯한 차림으로 시선을 끌었다. 옷차림만큼 세련된 인사말을 듣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중년 남성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옷이 좀…튀죠?”

반면 젊은 남성 직원들은 ‘여성 임원이 온 뒤로 회사 분위기가 많이 자유스러워졌다. 패셔너블한 여성 임원의 모습 자체가 새로움에 대한 메시지가 된다’고 말했다. 이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이 ‘튀는’ 옷차림으로 공적인 공간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파워우먼’의 옷 입기에 대한 나의 호기심도 되살아났다.

20세기 후반까지 일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의 옷을 흉내 내 입었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여성들은 ‘예외적’ 존재였기에 규칙을 따르기 위해서든, 이기기 위해서든 남성의 옷을 입어야 했다. 조르조 아르마니처럼 남성적인 여성복을 내놓은 디자이너들이 돈방석에 올랐다. 여성이 남성 옷을 버리고 패셔너블한, 즉 여성적 옷을 다시 입은 건 여성의 지위가 상승해 더이상 남성들을 흉내 낼 필요가 없어진 뒤였다. 실적과 연봉에 비례해 여성 기업인의 복장이 화려해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사회 최상층은 여전히 남성들의 세계다. 올 1분기 말 기준 우리나라 30대 그룹 계열사 284개 중 여성 임원이 전혀 없는 회사가 74%이고 전무 이상 고위 임원이 된 여성은 오히려 크게 줄었다고 한다. 이처럼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여성들은 옷을 잘 입고도 패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린다. 반면 남성이 옷에 대해 말하면 ‘감각 있다’는 칭찬을 받는다. 이 같은 상황은 미국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뛰어난 패션 감각을 잘 이용해온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대통령에 뜻을 둔 이후로는 자신의 옷보다 일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불평해 오히려 빈축을 사며 남녀의 이중적 잣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성이 옷에 대한 의식을 바꿔놓지만 때로는 패션으로부터 평등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겨나기도 한다. ‘옷과 그녀들’의 역사에서 내가 배우는 점이다.

※‘옷과 그녀들’이란 제목은 ‘옷과 그들’(김유경·삼신각·1994년)에서 따온 것입니다.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holde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