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국민연금의 선택을 주목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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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산업부장
천광암 산업부장
1994년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중에 ‘베이비 데이 아웃(Baby‘s Day Out)’이라는 코미디가 있다. 3인조 유괴범이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기를 유괴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내용이다. 극 중에는 유괴범들의 손에서 벗어난 아기가 우연히 동물원의 고릴라 우리(Cage)로 기어서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다. 다행히 고릴라는 아기에게 호감을 보인다. ‘돈벌이 밑천’인 아기를 우리에서 꺼내기 위해 고릴라의 눈치를 살피는 극 중 유괴범들의 곤혹스러운 표정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최근 삼성과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 간에 벌어지는 공방전은 이 영화와 잘 오버랩된다. 삼성이 비즈니스 성과 면에서는 굴지의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고 하지만 지배구조 면에서는 아주 취약하다. 월가 전체를 등에 업은 거대 헤지펀드가 보기에는 손쉬우면서도 좋은 돈벌이 밑천이다.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경우 범법자는 아니지만, 오직 돈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극 중 3인조와 비슷하다. 헤지펀드들은 한국의 산업 발전이나 일자리, 사회공헌과 같은 공익적 측면에는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다. 본전을 뽑을 기회가 오면, 과거 론스타나 소버린이 그랬던 것처럼 돈 보따리를 챙겨서 미련 없이 떠날 것이다.

삼성과 엘리엇 간의 공방에서 국민연금의 존재는 영화 속 고릴라에 비견할 만하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지분 11.2%를 갖고 있다. 단일 주주로는 최대다. 국민연금이 17일로 예정된 삼성물산 임시 주총에서 제일모직과의 합병에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을 하면 엘리엇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가 된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과 경영 활동에는 큰 타격이 예상된다.

거센 후폭풍은 삼성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국민연금은 2014년 말 기준으로 국내 시가총액 20위 기업 중 15개 기업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큰손이다. 이런 국민연금이 ‘OK 사인’을 준다면 유괴범들은 마음 놓고 어린아이를 꺼내 가서, 계획했던 돈벌이를 할 것이다. 국내에는 경영권 방어 제도가 거의 없는 데다가, 100대 그룹 중 73%가 오너 세대교체기에 진입했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대기업이 헤지펀드의 먹잇감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한다.

물론 국민연금으로서는 이와 반대되는 고민도 있을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보험료를 받아 운용하는 처지에서는 단기적으로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선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세계 1위 의결권자문회사인 ISS가 삼성물산의 합병 건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한 것이 무엇보다 큰 부담일 수 있다.

하지만 ISS의 의견은 단순한 참고 사항일 뿐이다. 국제금융계에서는 목표가 되는 기업에 대해 1단계로 헤지펀드가 5%(나라에 따라서는 2% 또는 3%)가 조금 넘는 지분을 매집해서 경영참여 선언을 하고, 2단계로 의결권자문회사가 헤지펀드의 행동을 지지하는 의견을 내놓고, 3단계로 뮤추얼펀드 등 공격성이 덜한 다양한 기관투자가들이 뒤따르는 것이 하나의 공식처럼 되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ISS의 의견은 오히려 비판적으로 뜯어보는 것이 맞다.

선택을 앞둔 국민연금은 올해 5월 행동주의 펀드인 트라이언이 화학회사 듀폰을 공격했을 때 미국의 최대 공무원연금인 캘퍼스가 보였던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캘퍼스의 앤 심프슨 기업 거버넌스 담당 헤드는 트라이언 펀드에 맞서 듀폰 경영진을 옹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기업)들을 잘 보살펴야지 거위 털을 잘라내는 것은 장기적으로 이익이 아니다.”

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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