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영]적당한 쇼는 괜찮지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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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영 사회부 차장
이동영 사회부 차장
선출직이나 고위직 같은 권력자가 뭔가를 결정하면 그게 ‘결단’인지 ‘쇼’인지 모호할 때가 많다. 모든 정책에는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지만 권력자의 결정이 ‘결단’인지 구분하는 건 중요하다. 결단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나라와 국민을 살리지만, 쇼는 거꾸로 (자신의 인기만 올리고) 국가와 국민을 속이고 교묘하게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구국의 결단’이란 표현까지 썼던 1990년의 여야 3당 합당은 거창한 구호와 달리 실상은 어떻게든 정권을 잡아보겠단 의지의 표현일 뿐이었다.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 부시 정권도 어렵게 결단한 것처럼 포장했지만 나중엔 별 고민도 없이 손쉽게 전쟁을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광해군은 이전까지 중국에 사대정책을 폈던 것에서 벗어나 실리외교라는 위험한 선택을 감행했다. 자신의 자리까지 위협받을 수 있고 수많은 꼴통 대신의 ‘아니 되옵니다’ 구호를 무시하기 쉽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손쉬운 ‘쇼’ 대신 전쟁을 막기 위해 ‘결단’을 선택했다고 본다.

지금 온 나라를 뒤덮은 메르스 공포를 보면서 지금 이 나라엔 결단이 있는지 쇼만 넘쳐나는지 궁금하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학교 휴업일과 대상 지역을 늘리는 방안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학교가 메르스 전파와 관련된 적이 없으니 수업 재개를 강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말이다. 학교에 안 가는 아이들이 낮에는 PC방으로 몰려가고 밤에는 학원 수업을 받는데 이렇게 풀기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조 교육감은 내놓지 않고 있다. 그저 학교를 문 닫게 하는 손쉬운 방법만 내놓을 뿐 실질적으로 학생의 메르스 감염을 막을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학부모에게도 학생에게도 학교 문 닫기는 별 도움이 되질 않고 불안감만 키울 뿐이다. 그래서 별 효과도 없는데 카메라에 얼굴만 찍히는 조 교육감의 메르스 대책이란 건 ‘쇼’라고 본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자기 페이스북에 자가 격리 환자의 거주지와 그 자녀의 학교 이름까지 공개한 게 쇼인지 결단인지는 워낙 명백하니 구분할 가치도 없다. 쇼라고 해도 적당히 하면 관심도를 높이고 건강한 비판여론을 만드는 효과도 있으니 봐줄 만하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그래도 이 나라 모든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겠다고 만들어 놓은 국민안전처가 별 역할 없이 손놓고 있는 것보단 낫다.

박근혜 대통령은 14일부터 미국에 갈 예정이었지만 ‘국민 안전’을 위해 일정을 연기했다. 이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겠지만 오히려 일정대로 가겠다고 하는 게 더 어렵고 힘든 결단 아니었나 싶다. 그러려면 방미 취소를 요구하는 야당도 설득해야 하고 국민에게도 지금 왜 미국에 가야 하는지 힘들게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양해를 구하면 이 모든 성가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건 아닌지 걱정이다. 한번 미안한 행동을 했으니 다음에 다시 만날 때 ‘작은 선물’이라도 줘야 할지 모른다. 이런 걸 모두 접고 방미도 취소한다길래 대통령이 직접 질병관리본부로 출근해 상황도 파악하고 환자도 만나보고 가택격리에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러 현장에도 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국민 불안을 해소해 나가겠다’는 선언적 말만 있을 뿐 구체적 실행 대안이 곁들여진 대통령의 역할은 발표되지 않았다. 곧 메르스 사태가 꺾이느냐 아니냐 중요한 시점이 온다는데 ‘대통령이 미국 방문까지 포기하고 청와대를 지키면서 도대체 뭘 했느냐’는 비판의 소리가 나오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동영 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
#결단#쇼#광해군#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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