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날다람쥐 닮아가는 한국경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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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산업부장
천광암 산업부장
날다람쥐는 재주가 많은 동물이다. 달리기는 기본이고, 나무를 타거나, 헤엄을 칠 수도 있으며, 나무에 구멍을 팔 줄도 안다. 또 날다람쥐의 옆구리에는 엷은 막이 자라 있어서 네 다리를 활짝 펼치면 마치 행글라이더처럼 나무 사이를 활공(滑空)할 수도 있다. 재주가 많아서 자연계의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날다람쥐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이유는 날다람쥐가 갖고 있는 재주가 하나같이 어중간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날 수 있지만 지붕을 넘지 못하고, 나무를 타지만 가지 끝까지는 못 가고, 헤엄을 치지만 계곡을 건널 수 없고, 구멍을 팔 줄 알지만 자기 몸을 충분히 숨기기에는 부족한 수준이다. 달리는 속도 또한 어중간하다고 한다.

한국경제가 날다람쥐를 닮아가고 있다. 이것저것 욕심은 많이 내지만, 말만 앞서고 실천력이 뒤따르지 않다 보니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지난 10여 년간 정부와 정치권이 대대적으로 발표한 비전과 청사진만 보면 한국은 지금쯤 전통적인 제조업은 물론이고 금융 의료 교육 등 고급서비스업과 미래형 제조업 분야에서도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거창하게 등장했던 비전일수록 속 빈 강정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2월 야심 찬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 로드맵’을 발표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숲을 기르면 호랑이는 저절로 오게 돼 있다”며 외국 금융사들을 대거 유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금융허브 비전에 따라 서울 여의도에는 국제금융센터(IFC)가, 부산에는 부산국제금융센터가 지어졌다. 그런데 1월 말 현재 시점에서 IFC는 3개동 중 1개동은 입주한 금융사가 하나도 없다. 부산국제금융센터에는 외국 금융사는 1곳도 없고, 한국 금융공기업 9곳만 입주해 있다고 한다. 칡넝쿨 같은 규제가 개선되지 않다 보니, 오라는 호랑이는 안 오고 집고양이 몇 마리만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한강의 기적에 이어 한반도 기적을 만들 미래전략”이라면서 녹색성장을 새로운 국정비전으로 제시했다. 이후 저탄소차협력금제 등을 법제화했으나 현실은 뒷전이고 의욕만 앞서는 내용이어서, 많은 반론에 부닥친 끝에 사실상 백지화됐다. 되지도 않을 일에 아까운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됐다. 현재로선 녹색성장의 성과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어서 ‘한반도의 기적’은 고사하고, ‘동네 기적’이라고 하기에도 낯 뜨거운 수준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등 4대에 걸쳐 추진돼온 서비스산업 선진화는 첫 단추도 못 끼우고 있다.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조차 3년 넘게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실정이다.

이 밖에도 역대 정부와 현 정부가 요란한 구호와 함께 벌여만 놓고 제대로 실행을 하지 않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이런 마당에 정부와 야당은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새 애드벌룬을 띄우느라 여념이 없다. 마치 소득주도성장이 한국경제를 ‘저성장-저고용의 늪’에서 건져낼 비책(秘策)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은 내수시장이 협소한 한국에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론이다. 자칫하면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리고 기업의 연구개발 역량을 훼손해, 지금 한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수출산업의 경쟁력을 심각하게 훼손할 위험성이 크다.

이미 몸에 지닌 다섯 가지 재주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갈고닦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새로운 재주만 찾아 헤매는, 어설픈 날다람쥐를 보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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