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무늬만 어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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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대학에 몸담은 사람들과 만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얘기가 “요즘 대학생들 안쓰럽다”는 말이다. 복잡한 대입 전형을 뚫고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취업난을 뚫기 위해 다시 공부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 대학생으로 바뀌면서 달라지는 건 EBS 영어 문제집이 토익 문제집으로, 국영수 내신 경쟁이 학점 경쟁으로, 학교생활기록부 비교과 관리가 스펙 쌓기로 바뀌는 정도랄까. 출석부에서 출(出) 자보다 결(缺) 자가 많은 걸 청춘의 패기인 줄 알았던 과거 대학생들과 비교하면 수행 과제가 너무나 많은 요즘 대학생들은 딱한 처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근래 만난 몇몇 교수는 “요즘 대학생들은 공부를 제대로 안 한다”고 말했다. 4년제대와 전문대, 서울 소재 대학과 지방대를 가릴 것 없이 공통적으로 나온 얘기다. 대학생들이 취업 준비 때문에 새벽부터 도서관에서 책에 파묻혀 산다는데…. 의아해 물어보니 다양한 사례가 나왔다.

영문학과 A 교수는 “몇 년 전부터 대학생들 수업 태도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졸리면 어떻게든 졸음을 쫓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는데 요즘은 출석 체크만 끝나면 아예 엎드려서 자는 애들이 많다”고 말했다. 정작 영어 시간에 자던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토익 교재를 들고 도서관으로 뛰어간다고 전했다. A 교수는 2000년대 들어 중고교생들이 밤에 학원에서 공부하고 낮에 학교에서 자는 ‘교실 붕괴’가 심해진 현상이 대학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간 학부 강의만 하다가 이번 학기부터 대학원 강의를 맡게 된 행정학과의 B 교수는 지난달 첫 수업 시간에 신입생들에게 대학원 진학 동기를 물었다. 취업난의 도피처로 대학원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기에, 학생들에게 어떻게든 동기 부여를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행정학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라는 식의 평범한 대답을 이어 갔다. 20대 중반이나 된 성인들이 구체적인 장래 계획이 없다는 데 슬슬 암담해지던 B 교수는 마지막 대답에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소위 SKY 대학을 나온 학생의 대답은 “부모님이 가라고 하셔서”였다.

교양학부 소속 C 교수는 대규모 강의에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만지작거리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진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강의 내용을 메모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토익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공모전에 낼 작품을 만드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C 교수는 “요즘 일부 학생은 인문학 강의 시간에는 취업 준비하고, 면접에서 인문학이 중요해진다고 하면 인문학 특강을 찾아다닌다”면서 “TPO(시간, 장소, 상황)에 따른 판단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런저런 사례를 종합해 보면 대학생들 사이에서 공부의 양은 늘었지만 학업의 질은 떨어지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다. 교수들은 그 원인으로 대학생들의 의존성과 불안감을 꼽았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코치에 따라 학원 시간표대로 움직인 아이일수록 대학생이 되어도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매 순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 시점인지에 대한 판단력도 흐려진다. 다들 취업을 하려면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하니 불안한 마음에 떠밀려 바지런히 움직일 따름이다.

어린 학생들의 사교육 양극화만큼이나 다 큰 학생들의 자기주도력 양극화가 우려된다. 세상은 날로 복잡하고 치열해지는데 이를 뚫고 나갈 자기만의 의사결정 능력이 떨어지는 무늬만 어른이 늘어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대학생#취업난#스펙#태블릿#공모전#무늬만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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