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선미]스위스 시계와 ‘유튜브 김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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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스위스에 가 보니 취리히 태생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실은 한국에서 더 유명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을 빌리자면, 취리히는 ‘세상의 위대한 부르주아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취리히의 전차는 이국적이었다. ‘미그로스’ 슈퍼마켓도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으로 아주 깨끗해 점심으로 보도블록을 깨서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난 주말 방문한 취리히는 정말 그랬다. 전차 윗부분엔 스위스 디저트 ‘슈프륑글리’의 마카롱 사진이 있었다. 미그로스 슈퍼가 운영하는 현대미술관은 과거 양조장을 공업 디자인으로 변형시켜 옛것과 새것의 조화를 드러냈다. 트럭덮개를 재활용한 스위스 가방 ‘프라이타크’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컨테이너 박스들을 쌓아올렸다.

날이 저물었다. 스위스인 은행원과 결혼한 대학 후배의 집으로 저녁식사를 초대받아 갔다. 후배의 남편이 스위스 전통요리인 라클레트(치즈를 녹여 감자, 피클과 함께 먹는 음식)를 차려냈다. 평소 남편이 요리를 하느냐고 묻자 후배는 “언니, 나도 일하잖아”라고 했다. 투자 컨설턴트인 후배에게는 맞벌이 부부가 가사도 함께 맡는 게 당연했다. 후배의 남편은 유튜브 동영상에서 본 대로 한국의 김치도 담갔는데, 그 맛이 훌륭했다. 비결을 묻자 그는 “어려서부터 ‘왜’라는 질문과 도전을 환영하는 학교 교육이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후배 부부에 따르면, 스위스 사람들에게 일과 가정의 균형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였다. 직장에서 스위스 사람들의 일 처리는 한국인의 눈에는 복장 터지도록 느리지만 언제나 완벽하다고 했다. 퇴근 후에는 가족과 캠핑을 한다. 후배는 연방정부가 집으로 보낸 우편물도 보여줬다. “공공건물 창틀을 무슨 색으로 칠할지도 주민 투표로 물어본다니까. 원하는 색에 동그라미를 쳐서 다시 우체통에 넣으면 돼.” 스위스 직접민주주의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취리히로 향하기 전 나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시계박람회인 ‘바젤월드 2015’를 취재했다. 스위스 명품시계 ‘태그호이어’는 구글, 인텔과 손잡고 스마트시계를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불가리’도 스위스 보안전문기업 ‘위즈키’와 손잡고 스마트시계를 선보였다. 손목시계에 근거리 무선통신 안테나를 탑재해 스마트폰과 개인정보를 연동할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스위스 금 세공사와 보석상들은 시계로 눈을 돌렸다. 시계공 길드(조합)들은 성실함과 정교함으로 끝없는 혁신의 역사를 써 왔다. 오늘날 스위스의 시계 수출액은 연간 약 24조 원(2013년 기준)이다.

위기는 있었다. 1970년대 일본의 전자시계를 장난감 수준이라고 무시하다가 시장의 주도권을 뺏겼다. 다시 뭉쳐 패션시계로 시장을 탈환한 뒤 수제 명품시계를 발전시켰다. 지난해엔 미국 ‘애플’이 태그호이어의 임원을 스카우트했다. 구원투수로 나선 장클로드 비베르 회장은 “태그호이어의 재고와 매장 관리가 후커(창녀) 같다”고 질책했다. 태그호이어는 불과 몇 달 만에 ‘가격을 낮춘 젊은 럭셔리 브랜드’로 탈바꿈했다. 그는 럭셔리의 본질을 정의해 달라는 나의 질문에 “첫째도 마지막도 고객만족. 단 품질, 전통과 아트, 혁신에 기초할 것”이라고 답했다.

요즘 중국시장의 성장세가 주춤해져 새로운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부러운 스위스 시계의 저력을 보았다. 그것은 옛 공장이나 헌 트럭덮개를 재탄생시키는 지속가능한 혁신, 정치적 안정 속에 실용을 추구하는 스위스 사람들의 명품 정신, 그리고 후배의 남편이 창의적으로 담근 ‘유튜브 김치’였다. ―취리히·바젤에서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kimsunmi@donga.com
#스위스 시계#유튜브 김치#알랭 드 보통#슈프륑글리#바젤월드 2015#태그호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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