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상식과 율사의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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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오피니언팀장
이진 오피니언팀장
오래전 정치부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이다. 14대 때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조홍규 의원은 국회 상임위원회 중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소속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법사위에는 법률가 출신 의원들이 절반을 웃돈다. 19대인 현재도 법사위 16명 중 11명의 여야 의원이 율사다.

조 의원은 대학을 중퇴해 입학한 지 39년 만에 뒤늦게 졸업장을 받았고 법률 전문가도 아니었다. ‘판검사 출신도 아니면서 법사위에는 왜 왔느냐’는 힐난에 그는 “나도 왕년에 ‘쌀 검사’는 해봤다”고 응수했다. 그런 그가 법사위에서 율사 의원들을 누르는 일이 적지 않았다. 법전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조 의원이 휘두른 무기는 ‘상식’이었다.

이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이른바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기사를 읽은 뒤였다. 공직과 관련된 부패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으니 법으로라도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앞당긴다는 취지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일부 항목이 상식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행도 되기 전인 새 법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 청구의 대상이 됐다.

애초 발의됐던 초안에서 사립학교·학교법인과 언론사의 임직원으로 적용 대상을 넓힌 최종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의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특히 법 전문가들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율사 의원들은 과거 배운 정치(精緻)한 법 논리와 해박(該博)한 법률 지식에 비추어 최종안이 배우자를 신고하도록 해 헌법이 보장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지는 않았을까.

헤아려 보니 19대 국회 재적 295명 중 율사 의원은 47명에 이른다. 여당인 새누리당과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이 똑같이 23명이고 정의당 의원이 1명이다. 길든 짧든 힘겨운 공부기간을 거쳐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똑같은 경험을 지닌 선후배 변호사 의원들이 전체의 16%를 차지한다. 이 중 새정치연합 민홍철 의원은 군법무관 임용시험을 거쳐 변호사가 된 예외적 사례이긴 하다.

어쨌든 율사라는 단일 전문가 그룹이 전체 의원들의 직업군 중에서 가장 많다. 법무사로 일했던 신학용 새정치연합 의원을 추가한다면 법률 전문가는 48명이 된다. 여야 율사 의원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새누리당 의원들은 판검사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에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다수가 사법연수원을 나온 뒤 곧바로 변호사 개업을 했다는 점뿐이다. 새정치연합의 문재인 대표와 우윤근 원내대표는 나란히 변호사 출신이라는 점도 색다르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통과될 때 반대표를 던진 의원 4명 중 율사 의원은 새누리당의 권성동, 김용남 의원 2명에 그쳤다. 두 의원 모두 검사 출신이다. 권 의원은 “국민의 정당한 청원이나 민원을 공무 담당자가 부정청탁이라고 신고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 의원은 “공직자가 배우자의 금품 수수 사실을 알았을 때 신고하도록 한 불고지죄 조항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반대 이유를 제시했다.

대다수 율사 의원이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기는커녕 김영란법의 위헌 가능성도 지나치고 말았다. 합리적이고 빈틈이 없어야 할 입법 절차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이라고 진단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고유 영역이라고 내세우는 입법 과정에서 이 정도로 판단을 그르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이나 다름없다. 성경에는 짜지 않은 소금을 두고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진 오피니언팀장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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