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단두대보다 무서운 감사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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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산업부장
천광암 산업부장
올해 경제 분야에서 천송이 코트나 푸드트럭만큼 화제를 모았던 키워드는 많지 않다. 천송이 코트와 푸드트럭은 3월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 공무원들과 기업인, 중소 상공인들을 모아서 주재한 토론회에서 규제 완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토론회에서 보여준 대통령의 의지가 너무도 결연했기 때문에 많은 국민은 규제 완화의 성과가 풍성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규제개혁 성과는 기대 이하다. 외국인들의 천송이 코트 구매를 가로막는 주범으로 지목됐던 ‘액티브 X’ 보안프로그램 설치 의무는 내년부터 없어진다. 9개월이 걸린 셈인데, 이미 타이밍을 놓쳐서 뾰족한 정책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푸드트럭은 수혜 대상이 고작 22대에 불과하다.

박 대통령의 ‘단두대’ 발언은 지지부진한 규제 완화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을 읽은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들을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 처리하겠다”며 ‘규제 기요틴’ 도입 의사를 밝혔다.

해당 부처가 필요성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규제를 자동으로 일괄 폐기하는 ‘규제 기요틴’의 유용성은 멕시코와 헝가리 등에서는 이미 검증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제도가 ‘규제대국(大國)’ 한국에서도 과연 통할 수 있을까? 결론을 내기에 앞서 지난달 말 한 경제신문에 난 다음 기사가 떠오른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서울 서초구 우면동 삼성전자 우면연구개발센터에 지하연결통로를 만들기 위해 승인신청을 했다. 관련법에는 이를 금지하는 조항이 없었는데도 서울시와 서초구청의 담당부서는 ‘공무원 재량권’을 내세워 18개월 동안이나 발목을 잡았다. 특히 서초구청에서는 구청장이 공사허가를 내주라고 지시했지만 담당부서가 구청장의 지시를 뭉개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담당 공무원들이 나중에 감사에서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몸을 사렸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규제를 ‘암 덩어리’로 지목해서 없애려 해도 뜻대로 잘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장 등 선출권력은 길어봐야 4, 5년 뒤면 바뀌지만 공직사회의 ‘슈퍼 갑’인 감사원은 영속하는 권력이고, 공무원들로서는 후자의 눈치를 더 살피게 되는 것이다.

투자도 마찬가지지만, 정책과 행정은 부족한 정보로 의사결정을 해야 하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따르게 된다. 결과가 다 드러난 다음에 당초 의사결정이 맞았느니 틀렸느니 꼬투리를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런데 상당수 감사원 감사가 이런 식으로 이뤄지다 보니 규제 공무원들은 마지못해 복지부동(伏地不動)을 하거나, 적어도 복지부동을 할 수 있는 핑곗거리를 마련하게 된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는 적극적으로 규제개혁을 한 공무원에 대해 감사원 감사를 면제해주는 방안을 추진하다 감사원의 반발에 부닥쳐 포기한 바 있다. 이는 규제 공무원들에게 ‘어느 줄이 생명줄인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결정적인 악수(惡手)였다.

12월 현재 중앙부처가 관리하는 규제는 1만4977건에 이른다. 지자체 권한에 속하는 규제는 4만1910건이나 된다. 이 두 무더기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규제 실타래는 단두대로 잘라내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규제 공무원들의 뇌리에서 ‘빅 브러더’의 검은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이 병행되지 않으면 규제 단두대도 천송이 코트와 푸드트럭에 이은 또 하나의 이벤트로 끝나게 될 것이다.

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감사원#규제 개혁#단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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