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치영]37년 병마개 시장 독점의 중독성 Ⅱ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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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영 경제부 차장
신치영 경제부 차장
필자는 지난달 25일 본란에 게재한 ‘37년 병마개 시장 독점의 중독성’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국세청의 술 병마개 제조업체 지정 규제를 개혁해야 할 ‘나쁜 규제’로 지적했다. 국세청은 이 규제를 통해 다른 기업들의 술 병마개 시장 진입을 막아 삼화왕관과 세왕금속공업 등 두 회사가 37년간 이 시장을 독점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리고 두 회사는 국세청 퇴직 관료들에게 고위 임원 자리를 보장해왔다.

칼럼을 본 한 중소 병마개 제조업체 대표가 메일을 보내왔다. 현우기술연구의 박승원 사장은 국세청의 병마개 제조업체 지정 규제 때문에 14명의 직원들과 함께 24년간 지켜온 멀쩡한 회사가 하루아침에 도산했다고 호소했다.

정부 규제로 중소기업이 망가진 사연은 이랬다.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포장지를 만드는 대기업에 다니던 박 사장은 1989년 현우기술연구를 설립한 뒤 알루미늄 막걸리 병뚜껑 제조 외길을 걸어왔다. 막걸리 발효 가스의 90%가 마개 밖으로 새나가도록 해 막걸리가 부패하지 않으면서 신선한 맛이 유지되는 병마개 기술을 개발해 2000년 특허도 받았다. 전국 막걸리 제조장의 70%에 병뚜껑을 공급해 2012년 4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상황이 180도 바뀐 건 작년 2월. 기획재정부는 소주 맥주와 마찬가지로 막걸리도 국세청이 병뚜껑 제조업체를 지정하도록 주세법 시행규칙을 개정했다. 매출이 급증하고 있는 막걸리 제조업자들의 탈세를 막는다는 취지였다. 국세청은 2014년 1월 1일부로 막걸리 병마개 업체를 지정하겠다고 발표했다.

박 사장은 막막했다. 국세청 지정을 받으려면 알루미늄 병마개에 납세증지를 인쇄하는 설비를 구입해야 하는데 30억 원이나 되는 돈을 구할 길이 없었다. 박 사장은 막걸리 병마개는 제조업체가 적어 국세청이 감독을 하면 탈세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병마개 업체를 지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알루미늄보다 증지인쇄 설비 값이 싼 플라스틱 병마개로 전환하고 국세청에 병마개 제조업체 지정을 신청했다. 12억 원의 은행 대출을 받아 플라스틱 병마개 제조설비와 증지인쇄 설비를 사들였다.

플라스틱 병마개를 열심히 만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삼화왕관 등 대기업들은 현우기술보다 플라스틱 원료를 싸게 공급받고 있었고 제조설비의 성능도 우수했다. 현우기술이 가진 설비의 하루 생산량은 30만 개인데 삼화왕관은 고성능 설비로 하루 200만 개씩 생산했다. 경쟁이 되지 않았다. 거래처를 하나둘씩 삼화왕관 등에 모두 빼앗겼다. 박 사장은 대출이자조차 갚을 수 없었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 본사 건물과 충북 진천군에 있는 제조공장이 경매에 넘어갔다.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동안 박 사장은 청와대 법제처 기재부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등 정부 부처와 여야 의원실을 찾아다니며 파산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24년간 애지중지 키워온 회사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그는 얼마나 좌절했을까.

“나는 이제 끝났지만 나 같은 피해자가 또다시 나오지 않도록 이런 나쁜 규제는 없어져야 합니다.” 처진 어깨의 박 사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지난달 20일 열린 규제개혁점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강한 규제개혁 의지를 밝혔지만 정부 부처들은 이미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규제의 권력’에 안주하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관료들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제2, 제3의 현우기술이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
#병마개#중소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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