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지순]통상임금,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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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통상임금 논란 불식한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급심에서는 일관성 없는 판결로… 노사협상 지연 등 부작용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판단 기준을 제시해야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근 수년간 가장 큰 노동계의 이슈를 들라고 하면 2013년 12월 18일의 통상임금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상위권을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난 수십 년간 상당수 기업에서는 임금의 구성 항목이 많아지고 그 지급 조건이 복잡하여 각종 법정 수당의 산정을 위한 기준임금(통상임금)이 얼마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돈 상태가 극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해당 여부를 둘러싸고 관련 법령의 불명확성, 일관성 없는 판결, 현장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정부의 행정지침 등으로 마치 지진 에너지처럼 노사 간 분쟁 에너지가 축적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로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해당 여부에 관한 긴 논란을 정리한 것은 우리 기업들의 불합리한 임금체계를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대법원은 원칙적으로 정기상여금을 소정 근로의 대가로서 기본급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임금으로 인정하되, 고정성이 없는 경우에만 통상임금에서 제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동안 통상임금 산정에서 제외되었던 정기상여금이 앞으로는 고정성만 인정되면 법정 수당 산정을 위한 기준임금에 반영되어 전체 임금의 증가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다만, 대법원은 근로자 측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한 기존 노사 합의를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추가 수당 지급을 소급해서 요구할 경우 그 금액의 과다로 인해 기업에 발생하게 될 심대한 타격을 막기 위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의 법리를 도입하였다. 법리 논란을 감수하더라도 법령과 판례, 행정 해석, 노사 합의가 만들어 놓은 혼란을 수습하고 불합리한 근로조건을 미래지향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 판단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법원의 의도와 달리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에도 통상임금 소송이 끊이지 않고, 최근에는 주로 통상임금 확대에 따른 추가 수당 지급을 둘러싸고 신의칙 적용 여부에 소송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1심과 2심이 서로 다르게 선고되는 등 일관성 없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어 요즘같이 구조조정, 임금체계 개편 등으로 바람 잘 날 없는 한국의 노사 관계에 새로운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500명 이상 대기업에서는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통상임금 소송 47건이 계류 중이라고 한다. 이 중에는 신의칙 인정 여부와 관련하여 1심과 2심의 판결 결과가 달라진 사건이 적지 않다. 그 결과 해당 기업에서는 통상임금에 관한 노사 협상 자체가 지연되고, 재정 상태가 유사한 동종 업체라도 영업 현황에 따라 법원별로 신의칙 인정 여부가 달라져 그로 인해 경쟁 업체보다 경영 환경이 불리해지거나 근로자의 근로조건이 달라져 이를 조정하기 위한 추가적인 임금 인상 요구가 발생하는 등 그 부작용이 적지 않다.

 애초 대법원은 노사 합의 외에 신의칙 적용 기준인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의 판단 요소로 초과근로의 상시성, 정기상여금 비율, 추가 지급에 따른 실질임금 인상률 등을 고려하였다. 즉, 정기상여금 비율이 높고 고액의 초과근로수당이 지급되는 기업들의 경우에는 신의칙에 따라 추가 수당 청구가 인정되지 않을 소지가 높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급심 중에는 대법원 취지와 달리 추가 수당이 인건비에서 차지하는 비중, 현금성 자산, 이익잉여금, 주주 배당금과 같이 신의칙 인정에 관한 구체적 기준을 설정하기 어려운 모호한 요소들을 추가하거나 소송 및 판결 시점의 기업 영업 현황, 심지어 기업의 규모와 임금 수준 등 객관성이 결여된 요소를 가지고 지급 능력을 판단하는 사례도 나타나곤 했다. 심지어 대규모 영업손실, 워크아웃 상태임에도 신의칙이 부정되는 사례도 있었다. 이처럼 기업의 재정 상태를 판단하기 위한 객관적이고 공통된 기준 없이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사정만으로 신의칙을 판단하는 것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와도 부합하지 않으며 앞으로 판결의 예측 가능성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신의칙 법리에 대한 하급심의 혼란을 막고 제2차 통상임금 전쟁을 종료하기 위해서는 현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되어 있는 시영운수 사건에 대한 신속한 심리 및 판단이 필요하다. 노사 모두 객관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세부적이고 안정적인 신의칙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 것만이 과거와 현재의 혼란을 해소하고 법적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정치적 혼란기에 입법 활동이 사실상 중단된 지금 대법원의 적극적인 의지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통상임금#정기상여금#추가 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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