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정자]김영란法과 선물의 정치학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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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원주민 ‘포틀라치’ 축제 “선물은 사회의 작동 원리”… 마르셀 모스 ‘증여론’ 탄생
부패는 법이 없어서 아니라 제대로 집행 안 됐기 때문인데
인간 본성 거스른 김영란법, 활기 잃은 사회에서 ‘저녁 있는 삶’이면 뭐하나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북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지역 원주민 부족들에게는 특이한 축제가 있었다. 축제 기간 중 부족들 간에 일종의 스포츠처럼 대결과 경쟁이 벌어지는데, 누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더 많은 선물을 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됐다. 우리 편에서 귀중한 물건을 상대방에게 주면 상대방은 더 값진 것으로 답례한다. 그러면 우리 쪽은 또 그보다 더 값진 것을 상대방에게 선물한다.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선물의 규모는 점점 커지면서 결국 양쪽이 자신들의 부(富)를 완전히 소진한 다음에야 축제가 끝난다. 포틀라치(potlatch)라는 이름의 축제다.

 여기서 부의 낭비는 위세(威勢)와 연관이 있다. 미친 듯한 증여에 의해 추장과 가신 사이, 또는 부족과 부족 사이에 위계질서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아낌없이 남에게 자기 물건을 주는 사람이 재산의 손해만큼 명성이란 추상적인 부를 획득한다. 그에 반해, 받기만 하고 답례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종속되고, 더 낮은 지위로 떨어져 그의 하인이 된다. 자원의 소모가 오히려 그것을 소모한 사람에게 특권을 안겨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한없이 무질서하고 자유로운 이 축제 속에 실은 매우 엄격한 규칙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했다(‘증여론’·1925년). 그것은 ‘주기’ ‘받기’ ‘답례’라는 3각형 구조이다. 이 세 단계는 그냥 자유롭게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라 엄격한 의무 조항이라는 것이다. 즉 선물은 반드시 주어야 하고, 주어진 선물은 반드시 받아야 하며, 받았으면 반드시 답례를 해야 한다. 이때 선물은 물건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환대, 서비스, 배려 같은 추상적인 개념도 포함된다.

 여하튼 선물의 급부(給付)와 반대급부는 겉보기에 자발적인 형식인 듯 보이지만 실은 엄격하게 의무적이어서, 이를 소홀히 하면 불행한 결과가 생긴다. 어느 추장이 손자의 돌잔치에 이웃 사람 누군가를 깜박 잊고 초대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앙심을 품고 추장의 손자를 죽였다는 전설이 한 원시 부족 사이에 전해 내려온다. 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 초대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전쟁을 선언하는 것과 같고, 받는 것을 거부하거나 답례하지 않는 것 역시 비슷하게 위험한 일이 된다.

 모스는 결국 선물이 원시 부족만이 아니라 문명화한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의 공통적 현상이며, 사회가 작동하는 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회적 인간이 사회 안에서 상호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 행하는 제일 첫 번째 행위이다. 모든 사회 고유의 예의범절의 시작이기도 하고, 경제적 행위로서의 신용의 기원이기도 하다.

 선물의 답례에는 원래 시간이 필요했다. 선물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답례하는 것은 물물교환이지 선물이 아닐뿐더러, ‘받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식사 접대나 장례식 조문 같은 서비스는 즉각 답례할 수 있는 성질의 급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답례는 필연적으로 지연된 시간을 요구한다. 답례의 지연된 시간이 바로 신용의 기초이다. 현대사회의 사회보장제도도 여기서 유래했다. 즉 평생의 성실한 노동에 대한 답례로 기업 혹은 국가가 노동자에게 연금 혹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여서 선물은 얼핏 물자의 순환이나 교역 같은 경제적 현상으로 보이지만, 모스는 정치적 의미를 찾는다. 물건을 주고받으려면 우리는 우선 창(槍)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개인 간 혹은 집단 간에 물건을 주고받다 보면 비록 적대적 사이라 하더라도 거기엔 무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평화의 관계가 형성된다. 하기는 무역을 하는 두 국가 간에는 전쟁이 없다.

 김영란법이 시행됐다. ‘연줄 사회’가 ‘실력 사회’로 전환하는 단초가 될 것이라느니, 국가 전체의 청렴도가 높아질 것이라느니, 사람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되돌려 줄 수 있다느니 하는 기대가 팽배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간섭하는 과잉 입법임은 분명하다. 부패의 만연은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는 법이 집행되지 않아서였던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불필요한 중복 입법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원초적 성질을 거스르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을 거스르면 활기가 없어지고, 활기가 사라지면 사회의 발전도 정체될 것이다. 어둡게 가라앉은 사회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다.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김영란법#포틀라치#마르셀 모스#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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