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진석]문자가 삶과 사유의 높이-넓이를 결정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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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문자 쓰는 사람들은 다양하고 다층적 의미로 사용
남의 문자 빌려 쓰는 사람은 협소한 의미로 제한해 사용
우리 사회 이념 갈등도 세계 변화와 연동하는 유동적 사유를 못하기 때문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지난달 10일 동아일보에 ‘문자와 한글과 일류 국가’라는 글을 발표하고 나니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도전적으로 제기된 문제는 “고유 문자가 없는 나라는 정신적, 문화적 독립이 영원히 불가능한가?”라는 것이었다. 좀 물러서서 말한다면 충분조건은 아니라도 필요조건임은 분명하다. 고유한 문자가 있어도 일류 국가가 안 된 나라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류 국가들은 모두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다.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기록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훨씬 더 그 이상이다. 문화적 활동의 정수가 문자로 드러나기 때문에 독자적인 문자를 가졌다는 것은 문화적인 높이에서 작동하는 독자적인 시선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조선 역사에서 세종의 시대가 가장 돋보이는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세종대에 혼천의(渾天儀), 간의(簡儀), 자격루(自擊漏), 앙부일구(仰釜日晷), 측우기(測雨器), 수표(水標) 등과 같은 발명품이 등장하여 괄목할 만한 성취를 보여주었는데, 아무리 효용적 가치가 있고 훌륭하더라도 한글을 이런 발명품들과 같은 차원에 놓고 보면 안 된다. 한글이라는 우리의 고유한 문자를 창제할 뜻을 가졌다는 것은 세종이 문자(문화)적인 높이에서 사유할 수 있는 높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다른 발명품은 모두 한글을 창제하려는 높이의 시선에서 비롯된 결과들이다. 한글은 또 하나의 발명품이 아니라, 모든 발명을 가능하게 하는 지배적 시선의 높이를 보여준다.

자신의 문자(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빌려 쓰는 사람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한자만 가지고 보자. 우리는 ‘선(善)’이라는 글자를 대부분은 ‘착하다’는 의미로만 새기며 사용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 글자를 ‘착하다’ ‘아름답다’ ‘우호적이다’ ‘좋아하다’ ‘크다’ ‘많다’ ‘탁월하게 잘하다’ ‘익숙하다’ 등등 우리보다 훨씬 다양하고 다층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인(仁)’이라는 글자가 갖는 의미를 정해서 말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안색이나 말을 꾸미지 않는 것’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 등등 넓은 범위에서 다양하게 사용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근본적인 특질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인’이라 하면 으레 ‘어질다’는 의미로만 새긴다. ‘논어’를 읽을 때 혹은 중국 고전을 읽을 때, ‘인’을 ‘어질다’는 의미로만 새기면서 스스로의 사유의 폭과 높이를 제한해 버리고 있다.

‘선’이나 ‘인’을 보더라도 그것을 원래 제작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를 다루듯이 글자들을 생동하는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여 쓰는 사람들은 매우 협소한 의미에 가두어서 고정시켜 사용하는 습성이 있다. 구체적으로 인식되기에는 매우 어렵지만 이 차이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지배적이냐 피지배적이냐, 아니면 끌고 가느냐 끌려가느냐 하는 문제까지도 결정할 수가 있다. 글자를 다양하고 다층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과 협소한 의미로 제한해서 사용하는 사람 사이에는 사유의 폭과 높이가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사유의 높이와 넓이는 삶의 높이와 넓이를 결정한다. 세계를 관리하는 넓이와 높이를 결정한다.

모든 것이 창조자에게는 유동적인 것으로 존재하지만 수용자에게는 특정한 의미로 고정되어 버리기 쉽다. 모든 이념도 생산자에게는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지만, 수입자에게는 불변의 수호 대상이 되어버린다. 우리 사회에서 해소되지 않고 있는 이념 갈등도 그 근본적인 원인을 보면 우리의 능력이 수용한 내용을 지키는 데에는 열심일 수 있지만, 세계의 변화와 연동하는 유동적 사유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것도 그런 것들이 발휘되는 높이에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지성의 결핍이다. 문자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보다도 문자를 창조할 때 도달해 본 적이 있는 지성의 높이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하는 일, 이념 갈등을 극복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일, 지배적인 시선을 갖는 일 등등이 문자를 이해하는 일과 떨어져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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