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함인희]‘바캉스 베이비’는 옛말인가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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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1970, 80년대만 해도 여름 휴가철이 끝나면 ‘바캉스 베이비’ 관련 보도가 신문과 TV에 단골로 등장하곤 했다. 여름 휴가지의 낭만과 흥분이 원치 않는 임신으로 연결되면서 미혼모의 낙태와 출산이 증가함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잠시 잠깐 관심을 끌다 사라지는 것이 관례였던 시절이 있었던 셈이다.

이제 세월의 흐름을 타고 혼전 관계에 대한 인식도 현저하게 바뀌었다. ‘혼전순결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여성의 68.8%가 찬성을 표한 1975년 자료를 보니 진정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된다. 당시 남성은 약 18%만이 자신도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데 동의해 ‘이중 성윤리’가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동일한 질문을 해보니 남성의 찬성률은 약 19%로 거의 변화가 없었던 반면에 여성의 찬성률은 47.5%로 감소하여 10명 중 5명 이상이 자유로운 혼전관계에 허용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으니 이미 주목할 만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흐른 2005년, 그때 엄마 배 속에 있던 녀석이 올해 4학년이 되었으니 어느새 10년 전의 일이 되었는데, 당시 필리핀 세부로 가족여행을 떠난 자리에서 밤낮으로 이국땅 휴양지의 자유를 만끽하며 분방하게 어울리던 한국의 미혼 남녀들을 보면서 문화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에도 자유로운 혼전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규범이 상륙했음을 홀로 뒤늦게 알아챈 때문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최근 조사에서 ‘결혼 상대자의 순결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문항에 찬반(贊反)을 질문한 결과 남성의 77%, 여성의 82%가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혼전순결이란 개념이 이미 낡은 것으로 변하면서 성별에 따라 달리 적용되던 이중 성윤리 또한 희박해지고 있음이 밝혀진 셈이다.

미국에선 1960년대 이후 성 해방 및 성 개방의 물결에 힘입어 혼전 성관계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매우 관대해지는 동안 ‘10대 임신’의 사회 문제화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경험했다. 10대 임신으로 골머리를 앓던 미국은 성 해방의 물결이 더욱 거셌던 유럽에선 왜 10대 임신이 이슈화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 다각도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미국의 10대들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성교육에도 불구하고 ‘첫 경험에서는 절대로 임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한데 더욱 흥미로운 건 10대 사춘기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와 10대 임신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이 드러났다는 사실이었다. 곧 미국 부모들은 사춘기 자녀의 성 개방을 통제와 간섭, 그리고 감시의 눈초리로 바라봄으로써 자녀들의 반발을 산 반면 유럽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성관계의 자유를 허용하는 대신 성관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점을 일찍이 강조한 결과 자율적이고 책임 있는 행동을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우리네 상황으로 눈을 돌려 보면 교육제도 및 가족문화의 한국적 특수성으로 인해 10대 임신이 사회 문제화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혼전 성관계에 대한 태도가 획기적으로 변화한 상황에서 평균 초혼 연령이 남녀 공히 30세를 훌쩍 넘어섰음을 고려할 때 미혼 남녀의 의도하지 않은 임신 가능성까지 배제하긴 어려울 것 같다. 행여 낙태가 피임의 한 방법으로 남용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를 떨칠 수가 없다.

초저출산으로 세계 1위를 기록 중인 국가에서 낙태율도 1위란 사실, 더불어 해외 입양아 수가 많게는 연간 2000명 수준에서 가장 최근에만도 600명 수준을 보이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큼은 물론이다.

사회적 변화 추세에 맞추어 법과 정책이 균형을 맞추어가야 함은 당연지사. 그렇다면 혼전 성관계의 규범화를 애써 외면하거나 그저 덮어두기보다는 변화한 현실을 직시하고 보다 현실적인 성교육에서부터 저출산 해법의 획기적 전환에 이르기까지 필요하다면 공론화 과정을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미루어선 안 되리란 생각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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