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대호]‘우리들의 일그러지지 않은 영웅’ 농협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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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장 선거 부정-비리 막자’ 개혁 열망 담은 위탁선거법
‘엄석대’ 농협과 농식품부, ‘못난 담임선생’ 국회가 합작… 기득권자에 유리하게 개악
농협과 위탁선거법 사태, 한국의 민주주의가 왜 겉돌고 우회하는지 잘 보여줘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문열의 걸작 소설이다. 주인공 엄석대는 교묘하고 대담한 부정행위로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모범생이다. 무능한 담임선생의 신임을 받아 교실을 지배하는 반장이다. 권모술수에 능란한 숨은 권력자의 전형이다.

그런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새 담임선생에 의해 반칙 행각이 드러나면서 ‘영웅’은 일그러지고, 왕국은 붕괴된다. 오래전에 읽은 이 소설이 생각난 것은, 우리가 성취한 민주화와 문명화를 깊이 회의(懷疑)하게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야만(野蠻)의 왕국과 엄석대를 접하기 때문이다. 유병언과 ‘해피아’가 그중에 하나다.

최근에는 ‘공공단체 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을 통해 훨씬 센 엄석대를 알게 되었다. 이 법은 내년 3월 11일 지역농협(1012개), 축협(142개) 등 총 1400개 협동조합의 조합장 동시선거 관리를 위해 제정되었다. 최양부 전 대통령농림해양수석비서관의 분석에 따르면 2012년 말 기준 지역농협의 총자산은 238조 원, 중앙회는 108조 원이다. 농협 빚 없는 농민은 거의 없기에, 채권자인 농협의 농민 및 농촌에 대한 영향력은 불문가지.

한편 지역농협은 8조 원의 무이자 지원금과 엄청난 자산을 운용하는 중앙회(장)에 종속되어 있다. 민주적 감시, 통제가 허술하면 농협도 농촌도 크고 작은 엄석대 왕국이 되기 십상이다. 실제 조합장만 한 알짜 자리가 없다. 억대 연봉에 판공비는 수억 원대다. 중앙회장은 그 10배다. 임직원들의 처우 역시 재벌기업 못지않다.

조합장 중 288명은 대통령도 부럽지 않다는 중앙회장 선거권자가 된다. 농협 운영 및 조합장 선거 과정에서 사생결단의 싸움과 부정, 비리는 필연이다. 바로 그래서 국민과 수백만 조합원의 이목을 집중시켜 좋은 사람도 뽑고, 공명선거도 실현하기 위해 동시선거와 위탁선거법을 만든 것이다. 법안은 올 2월 유대운 의원 등 15명이 발의해 4월 28일 국회 안행위 심사소위에서 원안수정 의결되어 5월 2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다른 공직선거에서는 허용되는 예비선거운동 기간이 사라졌다. 기존에 해오던 합동연설회, 공개토론회도 사라졌다. 심사 과정에서 원안에는 있던 언론기관 및 단체의 후보초청 대담, 토론회도 사라졌다. 바로 ‘우리들의 영웅’ 농협중앙회와 농림축산식품부 등의 반대 때문이다. 국회는 정말 못난 담임선생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른 공직선거와 달리 누가 유권자(조합원)인지도 모르는데, 후보가 유권자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도, 유권자가 후보들을 비교, 판단할 기회도 너무 없는, 기득권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규칙이다. 그런데 ‘쌍팔년도(단기 4288년, 1955년)’식 법이지만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핵심 이해관계자(출마 예정자)들도 몰랐다. 세월호 참사로 분노와 통곡의 나날을 보낼 때 슬그머니 수정,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농협과 위탁선거법은 한국 민주주의가 왜 어디서 좌초해 버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농협은 조합원(농민)에 의해서도 통제되지 않고, 농민을 위한 조직도 아니다. 가격 폭락 등에 우는 200만∼300만 농민들의 눈물을 모른다. 단지 조합장과 임직원들을 위한 신의 직장이다. 하지만 이들이 엄석대처럼 뒷골목, 풀뿌리를 틀어쥐고 국회를 움직인다. 이 오랜 부조리에 대한 원성과 개혁의 열망이 동시선거까지는 끌어냈는데, 막판에 기득권자들의 되치기에 당한 것이다. 왜 이럴까?

세계 보편적 현상인 대의민주주의 자체의 한계도 있다. 상정되는 법안 수가 너무 많아 소수(심사소위)가 심사를 주도하기에 로비에 취약할 수밖에 없으니! 그런데 우리 문제는 ‘광장’ 권력인 대통령, 국회의원, 지자체장에 대해서는 정치중독이라 할 정도로 관심이 많지만 인접한 뒷골목에는 관심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지극히 무능한 담임선생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수만 배는 더 중요한 것이 1987년 이후 28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8년의 우리 민주주의 겉돌기, 우회, 좌초가 아닐까? 왜 이렇게 아파트(관리소), 학교, 농협, 지방 등 뒷골목(?)에 ‘일그러지지 않은 영웅’들이 많은지? ‘쌍팔년도’식 야만이 판을 치는지?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농협#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공직선거#위탁선거법#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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