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배극인]대표이사 하지 말라는 덕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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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산업1부장
배극인 산업1부장
옛날 시골 어른들 덕담에 ‘중간만 해라’라는 말이 있었다. 앞장서다 정 맞지 말고,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출세하는 게 살아남는 비법이라는 의미였다. 험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체득한 나름의 생존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덕담이 오가는 사회에서 희망을 기대하긴 어렵다. 구한말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조선을 둘러보고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했던 배경 중 하나도 의욕을 잃은 조선인이었다.

연말 인사철을 맞은 요즘 재계 덕담이 “대표이사 하지 마세요”란다. 기업 경영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경영자를 형사처벌하는 법규가 쏟아져 언제 감방 갈지 모른다는 거다. 퇴직 후 문제가 생기면 자기 돈으로 변호사 비용까지 대야 하니, 대표이사 지낸 걸 후회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투자 의사결정이 빗나가 실패라도 하면 배임죄로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각오해야 한다는 건 오래된 리스크다. 새해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 대표들은 깜빡 주 52시간제를 어기거나 앙심을 품은 직원이 고발이라도 하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노사가 더 일하기로 합의해도 형사처벌을 피할 수 없다. 탄력근로제 운용기간 확대가 그나마 출구인데, 진척이 없다. 설령 성사된다 해도 노조 ‘합의’가 필수조건이어서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부당노동행위도 복병이다. 현 정권 들어 민주노총이 기업 현장 곳곳에 깃발을 꽂고 있는 가운데 사측이 관련 대책회의만 해도 검찰에 고발당하고 있다. 부당노동행위를 민사로 다루는 해외와 달리,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면할 수 없다. 반면 사업장과 생산시설을 무단 점거하거나 공장 진입로를 막는 노조의 부당노동행위를 규제하는 법은 없다. 한마디로 ‘기업인 유죄 추정의 원칙’이다.

제조업이나 건설업 대표라면 ‘운 좋게’ 산업안전보건법에 안 걸리게 해달라고 빌어야 한다. 시행규칙 670개 조문 중 법 위반 때 사업주를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규정이 583개다. 일부는 법 규정도 애매해 예컨대 여름에 덥다고 안전모를 벗은 근로자가 50cm 높이에서 떨어져 다쳐도 처벌된다. 추락위험 높이를 2m 전후로 명확히 규정하는 미국 일본과 달리 아무런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현행 7년 이하 징역에서 10년 이하 징역으로 처벌이 강화되는 법 개정안도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개정안은 숫자도 세기 힘든 2, 3차 협력업체 안전보건조치까지 책임지도록 해 경영 개입 소지까지 뒀다. 산업 현장의 안전이나 보건, 환경의 중요성을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하나부터 열까지 대표이사에게 무한 책임을 물어 형사처벌하는 게 과연 형평성에 맞는지 의문이다. 한 경제단체 계산에 따르면 국내 안전·보건·환경 관련 법률은 모두 63개로 임직원에 대한 징역 또는 벌금형의 형벌 규정은 1410개에 이른다.

자영업자 사장이라고 안심해선 안 된다. 올해 역대 최고 수준인 16.4% 올랐고, 내년에 10.9% 오르는 최저임금을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각오해야 한다. 올 들어 최저임금 범법자가 매달 약 100명씩 양산된다는 집계도 있다.

법을 잘 지키면 될 것 아니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걸면 걸린다’는 게 기업들이 인식하는 한국의 법 현실이다. 대표이사 하지 말란 덕담은 결국 기업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라는 의미다. 진짜 기업들이 아무것도 안 하면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배극인 산업1부장 bae2150@donga.com
#탄력근로제#부당노동행위#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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