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한규섭]한국 민주주의의 역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민주화를 성취한 지 30여 년이 흘렀으나 정부에 대한 신뢰는 민주화 이전보다 그다지 높지 못한 듯하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오랜 투쟁 끝에 성취한 민주화된 정부를 대다수 유권자가 불신하는 현실이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필자는 지난해 이맘때 33개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도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 조사에서 긍정 평가는 33개 기관 평균 27.8%에 불과했다. 2016년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도 조사 대상 40여 개국의 평균 긍정 평가가 약 42%였던 데 비해 한국은 약 24%로 거의 바닥권에 머물렀다.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그리스와 칠레 정도를 제외하곤 거의 최하위였다. 경제규모가 세계 12위인 것을 감안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결과다.

이 역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정치적으로 양극단화된 우리 사회의 특성상 거의 모든 사회 현상에 대해 그렇듯이 두 가지 경쟁적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우선 상황적 요인에 기인한 ‘박근혜 책임론’을 제기할 수 있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정으로 인해 정부 신인도가 추락했다는 해석이다. 이 가설이 타당하다면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을 통한 정부 개혁이야말로 정부 신뢰를 높이는 최적의 처방일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필자의 정부신뢰도 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율은 68%(신뢰지수 95%, 표본오차 ±1.2%포인트)에 이르렀다. 과반에는 못 미쳤지만 탄핵 결정을 내렸던 ‘헌법재판소’(42%)에 대한 긍정 평가가 33개 기관 중 가장 높았던 점도 이러한 가설을 지지하는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과연 박근혜 정부 이전에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더 높았을까? 2006년 OECD 조사 결과에서도 정부에 대한 신뢰는 24% 정도에 불과해 2016년과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중앙정부’에 대한 평가를 보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긍정 평가 비율이 완만하지만 꾸준히 상승하다가 2011년과 2012년에 2년 연속 하락한 이후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에 역대 최고치(30%대 중반)를 기록했다. 한마디로 누가 집권하든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설명이 가능할까? 우리 정부의 특징을 되짚어 보면 답이 보이지 않을까? 우리 정부의 가장 큰 특징은 정권에 따른 변화가 과도하게 큰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진보든 보수든 새 정권이 들어서면 모든 정부 부처의 정책 기조가 거의 완벽하게 뒤바뀌고 지난 정권의 정책은 모두 부정의 대상이 된다. 해당 정책을 담당했던 공무원이 사법처리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공무원은 자기 안위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과감한 업무 추진은 불가능하다. 유권자들이 민주화 이후 30여 년간 목격해 온 현실이다.

이런 한국적 상황이 정부 신뢰에 악영향을 미쳤을까? 필자의 조사에서 국가정보원(9.9%·33위), 방송통신위원회(15.2%·32위), 법무부(20.4%·30위), 감사원(20.9%·29위), 검찰청(23.0%·28위) 등 유독 사정 및 감독기관에 대한 신뢰가 모두 최하위권인 점이 눈에 띈다. 정부 전반에 대한 긍정 평가가 진보정부든 보수정부든 크게 다르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이 기관들에 대한 평가도 정부에 따라 크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2016년 OECD 조사 결과에서도 비교 대상국들에 비해 ‘경찰’ ‘국회’ ‘사법부’ 등에 대한 평가가 특히 낮았던 반면에 ‘가족’ ‘타인’ ‘금융기관’ ‘미디어’ 등은 비교적 양호한 평가를 받았다. 정치적 영향을 특히 많이 받는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가 유독 낮았다.

지금 우리는 현재진행형의 현장실험 한가운데 살고 있다. ‘박근혜 책임론’이 타당하다면 ‘적폐청산’을 내건 문 정부 막바지에 시행될 조사에서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대폭 상승할 것이란 합리적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반면 경쟁 가설이 더 타당하다면 문 정부 말기에도 정부에 대한 신뢰가 크게 개선되지 못할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설’에 대한 답이 궁금해진다.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공공기관 신뢰지수#박근혜#헌법재판소#국정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