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상진]잘못된 설계로 잃어버리는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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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버스를 이용하던 사람은 7월 가로변 정류장이 생기기 전까지 중앙버스전용차로에 있는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두역, 주엽역 정류장에 버스 추월차로가 없어 이미 승하차를 끝낸 차도 앞 버스가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대기 10분은 보통이었다. 신도시 구간을 빠져나가는 데만 30분 이상이 걸렸다. 왜 추월차로가 없는지 물어보니 모든 버스가 정류하니 추월차로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빨리 승하차를 끝낸 버스가 추월할 수 있는 여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지난 10년간 일산에서 버스를 이용하던 사람은 모두 이런 불편을 감내해야 했다.

비슷한 예는 많다. 얼마 전 집 근처 교차로에서 대형사고가 또 발생했다. 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는 교차로다. 다행히 며칠 전부터 안전을 위해 교차로 신호 운영 방식이 바뀌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호 정체가 심하다고 아우성이다. 이럴 바엔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나온다. 애초에 이 교차로는 위험하게 설계됐다. 두 터널이 교차로를 사이에 두고 이어지면서 터널을 빠져나오는 차와 터널에 진입하는 차가 얽히고설키게 됐다. 터널에서 빠져나온 차들이 교차로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다른 차들과 섞이게 만들었다면 좀 나았을 것이다.

위험한 설계를 바로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개별 터널이나 교차로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설계기준은 만족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터널과 교차로가 만나고 또다시 터널이 이어지는 경우의 설계기준은 없다. 개별 시설이나 구조물에 대한 설계기준은 있지만 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좀 더 큰 그림에 대한 기준은 없다.

설계기준은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고 불편을 막기 위한 조치다. 모든 상황에 맞춰 세세한 기준을 마련할 수는 없다. 또 최소한의 기준이기 때문에 더 나은 설계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비용 문제로 외면되기도 한다. 중앙버스전용차로 정류장부에 추월차로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는 기준은 없지만 이왕이면 만드는 게 좋았을 것이다. 따라서 공학적 설계기준이 모든 위험이나 불편으로부터 이용자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버려야 한다. 모든 설계기준은 만족시켰지만 여러 시설물이 만나면서 초래하는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닌지, 비용은 더 들어도 최소 기준보다 더 강한 기준을 적용하는 게 필요한지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선진국은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안전진단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도 같은 제도가 있지만 진단 대상에서 빠지는 시설이 많고 비용이라는 현실적 장벽 때문에 진단 자체가 유명무실해지기도 한다. 이제라도 설계기준 너머에 있는 위험요소를 파악하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자. 잘못된 설계로 귀중한 목숨과 시간을 잃어버리는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중앙버스전용차로#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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