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헌재]한여름의 유광점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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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유난히 덥다는 올여름 중에서도 제일 더운 날이었다. 경기 시작 후 한 시간 반가량이 지난 오후 8시. 온도계는 38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아니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그런데 아아,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LG 관중석의 두 남자는 점퍼를 입고 있었다. 조명탑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는 ‘유광점퍼’였다.

유광점퍼는 LG 팬들에겐 ‘가을 야구’를 상징하는 옷이다. LG는 2003년부터 2012년까지 10년간 가을에 펼쳐지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입고 싶어도 입을 수 없었던 옷이었다. 최근 몇 년간 LG가 포스트시즌에 올라갈 때마다 LG 팬들은 ‘유광점퍼’ 차림으로 가을 야구를 즐기곤 했다.

이날 이들이 일찌감치 유광점퍼를 꺼내 든 이유는 서울 라이벌 두산전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LG 팬들로서는 마음 아프게도 올해 LG는 두산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유광점퍼 응원을 펼친 이날도 LG는 두산에 졌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입추가 지나서도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요즘도 야구장에 가면 유광점퍼를 입고 LG를 응원하는 팬이 간혹 있다. 시즌 한때 잘나가던 LG는 여름 이후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며 중위권으로 처졌다. 요즘엔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더 많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팬들은 더 절실하다. LG 팬들은 올해 10개 구단 중 가장 많이 야구장을 찾았다. 13일 현재 유일하게 90만 명을 넘었다.

이런 열정적인 응원단을 둔 LG 선수단의 마음은 어떨까. 선수들이 말하는 가장 일반적인 감정은 고맙고 미안하다는 것이다. 팬들의 기대에 걸맞은 성적을 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심정이 오죽할까.

하지만 더 깊은 내면에 내재된 감정 중 하나는 두려움이다. 어제까지 모든 것을 줄 것처럼 응원하던 팬들이 어느 순간 엄청난 분노를 표출하는 존재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적이 좋지 않은 몇몇 선수들은 이미 극심한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시즌 중 ‘감독 청문회’를 열자고 주장했던 팬들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열성 팬들은 팀 체질 개선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팀이 짜임새를 갖추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어린 선수들을 키우고, 다른 팀에서 좋은 선수들을 영입해 오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LG는 어느 감독이 오건 당장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린다. 기초를 단단히 할 여유가 없다. LG가 종종 시즌 초반 좋은 성적을 올리다 중반 이후 미끄러지곤 하는 이유다. 한 시즌 팀당 144경기를 펼치는 장기 레이스에서 성적은 결국 팀 전력을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선수는 열정적인 LG 팬들의 응원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LG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는 건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현재의 LG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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