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섭의 패션 談談]<2> 분홍색 슈트와 인민복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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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남북 정상회담의 열기가 아직도 뜨겁다. 여름철이 아닌데도 냉면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냉면만큼 우리의 분단사와 함께 애환을 담은 음식도 없을 것이다. 피란민들이 아무 재산 없이 남쪽으로 내려와 생존을 위해 팔았던 음식이 이제는 짜장면, 설렁탕처럼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나에게는 평양냉면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리설주 여사의 옷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리설주가 입은 7분 소매의 단정한 투피스 슈트는 1960년대 미국의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세련된 패션 내조를 수행한 재키 케네디를 연상시켰다. 남북 화해무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꽃분홍색 또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제 남북 관계에서도 추운 겨울은 가고 따뜻한 봄이 왔다고 패션을 통해 알려주는 듯했다.

나는 내심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 김 위원장이 인민복 대신 양복을 입지나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의 선택은 역시나 인민복이었다.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본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조직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통솔할 때 가장 유용한 것이 유니폼이다. 대표적으로 교복과 군복일 것이다. 빈부의 차이를 구별하기 힘들고 계급을 나눠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며 동시에 확실한 소속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공산국가에서는 개혁·개방을 하기 전까지는 모든 국민, 인민에게 유니폼 착용을 의무화했다. 지도부에 있는 권력층부터 일반 인민에 이르기까지 같은 옷을 입는 것이 당연시됐다.

중국의 국부라 일컫는 중산(中山) 쑨원 선생이 고안한 인민복은 민족의, 민권의, 민생의 중국을 제창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상징하며 모든 인민이 입도록 했다. 이제는 중국 지도부도 양복을 입는 것이 보편화됐지만 전승절 70주년 열병식에는 시진핑 국가주석도 인민복을 착용해 중국이란 나라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정상회담 이전에 북한에서 펼쳐진 남북 예술단의 합동공연을 볼 때도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북한예술단의 패션은 군복과 한복으로 통일해 유니폼처럼 입던 과거와는 달리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롱드레스에, 어깨가 드러나는 시스루 레이스 소재에 반짝이는 스팽글을 매치했다. 남북한 가수들이 손에 손잡고 노래를 부를 때는 누가 남한 가수고 누가 북한 가수인지 모를 정도로 북한 가수들이 화려하고 세련돼 오히려 남한 가수들의 패션이 수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탈북정착민들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나 인터뷰를 보면 남한의 드라마나 가요 프로를 몰래 보는 게 가가호호마다 보편화됐다고 한다. 아이돌 가수들의 패션을 카피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미장원에서도 특정 배우의 스타일로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고 한다.

과거 우리도 그랬다. 미8군에서 흘러나온 레코드판이나 매거진을 통해 긴 머리의 장발 헤어스타일을 추종했고, 짧은 미니스커트를 한겨울에도 고집했다. 경찰서에 끌려가서 삭발을 당해도, 자를 들고 다니며 무릎에서부터 길이를 재며 단속을 해도 부질없는 일이었지 않은가.

패션의 변화는 사고의 변화다. 김 위원장이 북한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인민복을 고집한다고 하지만 이제 그를 수행하는 간부들은 양복을 입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TV의 여성 아나운서들도 이제 한복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옛말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어떤 경로로든 패션의 새로운 물결은 알게 모르게 북한 사회 내에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유니폼#인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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