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성철]과거사 정리, 조급하면 그르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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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사회부 차장
전성철 사회부 차장
연애편지라면 부치고 잊어버리면 그만일 텐데 신문기자는 그러지를 못한다. 여러 번 퇴고를 해도 다음 날 인쇄된 신문을 집어들 때면 늘 아쉬움이 든다. 이런 표현, 저런 문장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작은 후회부터, 때로는 내 생각이 짧았구나 하는 부끄러움까지. 종종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돌아가서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국정 농단 사건을 취재하며 수의를 입은 전 정권 실세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겠지’ 하는 상상을 해본다. 몰락한 보수정권이 가장 아쉬워할만한 대목은 MBC 피디수첩의 ‘광우병’편 방송과 이어진 촛불시위에 잘못 대응한 일이다.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 파동의 원인을 기울어진 인터넷 여론이라 생각했다. 그 결과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대북 심리전 조직을 누리꾼으로 위장해 정치판으로 내모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는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선택이 됐다.

광우병 파동의 원인을 국민과의 소통 부족에서 찾았다면 ‘댓글 사건’이나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 같은 불행한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이들 중 상당수는 가족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을 것이다.

대통령 임기가 한참 남아있던 정권 초에 이명박 정부가 잘못된 선택을 한 큰 이유는 조급증이다. 표밭과 무관하지 않은 인터넷 여론을 단숨에 역전시키는 데 골몰하다 보니 법을 어겨 가며 엉뚱한 데 힘을 쓴 거다. 정치를 잘하면 여론은 따라온다고 믿고 정도를 걸었다면 결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법무부가 주도하는 검찰 과거사 청산에서도 보수정권 실패의 원인이 된 조급증이 엿보인다.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대상으로 거론되는 20여 건의 사건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과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최근 일이다.

그중에는 심지어 재판이 안 끝난 사건도 있다. 법무부를 등에 업은 검찰 과거사위가 재판 중인 사건을 조사하는 건 검찰에 공소를 취소하라는 압력이 될 수 있다. 검찰 과거사위의 목표가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지난 9년을 지우고 부정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검찰 과거사위 활동이 불필요한 논란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첫 단추부터 조심스레 끼워야 한다. 조사 대상 사건 선정 기준 중 하나인 ‘검찰권 남용’은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검찰권 남용의 기준이 무엇인지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검찰 과거사위가 위원들의 정치적 편향에 따라 마음에 안 드는 사건을 골랐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다.

과거사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신중하게 정해야 한다. 조사 대상을 ‘과거사’라고 부르는 데 사회적 동의가 이뤄지지 않아서는 검찰 과거사위 조사 결과 역시 지지를 받기 힘들다. 논란이 끝나지 않은 일을 과거사로 명명해서는 어떤 결론을 내놓아도 정치적 선언 이상이 되기 힘들다.

조사 대상 사건 선정이 사법부에 미칠 파장도 감안해야 한다. 검찰이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받아 압수수색을 하고 체포나 구속도 했던 사건에 대해 검찰 과거사위가 ‘검찰권 남용’이라는 결론을 냈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영장재판을 담당했던 판사를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검찰권 남용의 공범으로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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