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촛불정신 誤讀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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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위원
이기홍 논설위원
‘촛불정신’은 새해에도 문재인 정부의 핵심 신조(信條)가 될 전망이다.

이 정부 출범 후 적폐청산 등 개혁 드라이브의 속도와 방향의 적절성 등에 이견이 제기될 때마다 여권 인사들이 “계속 진행”을 외치며 내놓은 정당성의 근거는 촛불정신이었다. ‘진보 역량 확산 vs 탈이념’ ‘과거 단죄 vs 미래·통합’ ‘성장 vs 분배’ 등 상충되는 가치 사이에서 치열한 토론과 시뮬레이션을 거쳐 최선의 조합을 찾아내야 할 정치인과 관리들은 ‘촛불정신’이라는 한마디만 나오면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내달렸다. 새해 장관들과 여권 인사들의 신년사에서도 “촛불정신의 초심을 잃지 말고 정책으로 구현하자”는 말이 쏟아졌다.

과연 촛불정신은 무엇일까. ‘나라다운 나라’를 강조해 온 문 대통령은 3일에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라는 국민 뜻”을 강조했다. 광화문을 메웠던 시민들이 원한 나라다운 나라는 어떤 것이었을까.


촛불정신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6월항쟁의 예를 생각해 보자. 6월정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우리 사회 다수가 공통된 의견일 것이다. 즉 유신과 5·17쿠데타로 빼앗긴 대통령 선출권 회복, 고문 강제연행 노동3권 탄압을 일삼는 군부독재의 종식, 인권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당시의 염원이었다. 직격탄과 강제연행을 무릅쓰고 거리를 메운 학생들, 시위대를 향해 티슈 뭉치를 던져주고 물병을 갖다 준 직장인들, 경적을 울려대던 택시 기사들 모두가 염원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였다.

그러나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운동 지도부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당시 주요 대학 운동권은 민족해방(NL) 계열, 그중에서도 주사파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1985년까지만 해도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민중민주주의(PD) 그룹이 남한을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노동자 계급 주도의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한 데 비해 NL은 남한을 식민지·반봉건 사회로 규정했다. 따라서 당장은 봉건적 요소, 즉 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주주의 쟁취가 필요하다는 대중노선을 폈다. 그 결과 양 김 씨 등 기성 정치권과 연대가 가능해졌다. 양키고홈 등 과격했던 구호는 ‘직선제 쟁취’ ‘독재 타도’로 온건 심플해졌고, 박종철 고문치사, 이한열 직격탄 피격 등을 계기로 대중의 폭발적 동참이 이뤄져 세계사에 빛날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럼 6월정신은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한 NL 그룹과 진보단체들이 목표했던 그런 세상의 구현이었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누구도, 후세의 역사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핵심 정신은 조직화 세력이 아니라, 희생을 감수하며 참여한 수많은 대중의 공통된 염원에서 찾아야 한다.

촛불집회 주최자는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이었고 그 핵심은 한국진보연대 등이었다. 당시 광화문의 시민들에게 물어보면 수십만 개의 이유, 다층적이고 다양한 촛불정신이 있겠지만, 그 공통분모는 좌파단체들의 목표와는 달랐다. 6월정신이 NL이 목표로 한 반미자주화, 민족해방이 아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좌파 운동권은 과거 “6월항쟁 직후 변혁 역량 확대를 위한 결정적 공간이 열렸는데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반성했었다. 현 정권의 개혁 정책 드라이브 곳곳에서 엿보이는, 이번 기회에 모든 영역을 진보색채로 바꿔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마도 그런 데서 연유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술 취하고 무능한 선장을 쫓아내고 새 선장을 찾을 때 염원했던 것이 ‘항해 좀 제대로 하라’는 것이었는지, 아예 항로를 완전히 바꾸라는 것이었는지, 그 해답은 이렇다 할 강력한 경쟁 후보 없이 치러진 대선에서 문 후보가 거둔 득표율(41.1%)에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촛불집회#촛불정신#문재인 정부#적폐청산#개혁#6월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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