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부형권]참 쉬워 보이는 ‘핀셋 프레임 경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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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경제부 차장
부형권 경제부 차장
미국 민주당은 불법체류자를 ‘미등록 이주노동자(undocumented migrant worker)’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공화당 소속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불법 외국인(illegal alien)’이라고 불러 왔다. 반(反)트럼프 이민자들은 “우리가 영화 ‘에일리언’ 속 외계인 같은 존재란 말이냐”고 반발한다. 불법체류자를 ‘결국 품을 미래 시민’으로 보느냐, ‘반드시 내칠 범죄자’로 보느냐에 따라 언어도 달라지는 것이다. 민주당이 상속세(estate tax)라고 부르는 세금을, 공화당이 사망세(death tax)라고 부르는 이유도 같다. 상속세엔 ‘재산을 물려받았으니 당연히 내야 한다’는 의미가, 사망세엔 ‘죽은 사람에게서도 걷어 가냐’는 항의가 담겨 있다.

용어나 표현은 인식과 사고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곧 구도(프레임·frame)가 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결국 프레임의 승리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토대)은 그대로일 텐데, 정권이 바뀌자 모든 ‘창조 경제’가 ‘혁신 경제’로 바뀌었다. 정부 부처의 ‘창조행정담당관’도 ‘혁신행정담당관’으로 개명됐다고 한다. ‘창조와 혁신’은 늘 붙어 다니는 실과 바늘 같은 표현인데 한국에선 상당 기간 작별해 있어야 한다. 경제 정책도 프레임 게임이니까.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5월 12일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해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했다. 그 순간 모든 공공기관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프레임에 휩싸였다. 한 공공기관 임원은 “자회사의 ‘정규직’조차도 ‘모회사의 정규직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노동경제학의 대가 남성일 서강대 교수는 비정규직 용어의 한계를 늘 지적해 왔다. “우리나라 비정규직 기준은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는가 하면, 심지어 피고용자가 아닌 사업자를 포함하기도 한다. 비정규직 기준이 근로조건의 열악성에 있다면 바른 용어는 ‘비정규근로’가 아니라 ‘취약근로’가 돼야 한다.”(남성일의 ‘쉬운 노동경제학’) 그러나 이런 전문가적 조언도 거대한 프레임 안에선 메아리가 생기기 어렵다.

흔히 세금은 죽음에 비유된다. 최대한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초(超)’라는 접두어 하나로 증세에 성공했다. 과세표준 ‘3000억 원 초과’의 초대기업 77개, ‘3억 원 초과’의 초고소득자 9만3000명 정도가 부자 증세의 대상이 됐다. 대기업도 아니고 초대기업, 고소득자도 아니고 초고소득자라면 세금 더 내는 게 당연하다는 프레임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결과다. ‘초’란 접두어가 합계 3조4000억 원이란 막대한 세수를 확보해 줬다.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빼내는 식으로 세금을 더 거두는 것이다.” 2013년 8월 당시 청와대의 대통령경제수석은 ‘세제 개편안이 봉급생활자와 영세상인의 세금 부담을 늘린다’는 불만에 이렇게 해명했다 “털 뽑힌 거위(시민)들의 아픔을 아느냐”는 거대한 분노만 촉발했다. 그때 한 친박(친박근혜) 의원조차 “많은 수의 거위 깃털을 뽑는 것보다 적은 수의 낙타에서 얻는 털의 양이 더 많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 낙타가 지금의 초대기업, 초고소득자인 셈이다. 더구나 정부와 여당은 ‘핀셋 증세’를 강조한다. 거위 깃털을 뽑을 때나 쓸 수 있는 핀셋으로, 낙타 가죽 벗기기를 해낸 셈이다.

미용도구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증세 같은 어려운 수술을 척척 해내니 신의(神醫)의 수준이라 할 만하다. 다만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학 경구(警句)가 마음에 걸린다. 참 쉬워 보이는 핀셋 프레임 경제의 무거운 대가는 없는 걸까.

부형권 경제부 차장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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