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류영남]플래카드와 현수막, 구별해 써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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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남 전 한글학회 부산지회장
류영남 전 한글학회 부산지회장
사람의 눈 모양은 옆으로 생겼는데도 한자인 ‘눈 목(目)’ 자는 왜 세워 썼으며, 글 또한 알파벳과 달리 한자는 왜 아래로 내리썼을까? 우리는 여기서 서양의 가로 문화와 동양의 세로 문화의 차이를 엿보게 된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플래카드(placard)’와 ‘현수막(懸垂幕)’이다. 글을 가로로 쓰는 서양에서는 자연히 옆으로 펼치는 플래카드를 만들었을 것이고, 한자를 세로로 써온 동양(중국)에서는 글자 뜻 그대로 매달아 아래로 내려뜨리는 현수막을 만들었을 것이다.

한자어에는 ‘가로 횡(橫)’이 든 말에 부정적인 의미가 많다. ‘남의 물건을 제멋대로 가로채거나 불법으로 가짐’을 횡령(橫領)이라 하고, ‘뜻밖의 재앙으로 죽음’을 횡사(橫死)라 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함’을 횡행(橫行)이라 한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사회에서는 질서를 위해 수평적인 횡적 관계보다 수직적인 상하 관계, 곧 종적인 관계를 중시했다. 그래서 ‘횡(橫)’은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고 체제를 어지럽게 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것이 ‘눈 목’ 자를 세워 쓴 연유이며, 세로글씨의 ‘현수막’이 생긴 배경이다.

국어사전들은 이 두 말을 달리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플래카드를 현수막으로 순화한다고 했다. ‘현수막’의 현(懸)은 ‘걸다, 매달다’란 뜻이요, 수(垂)는 ‘아래로 드리우다’란 뜻이다. 그러므로 ‘매달리는 힘’이 현수력(懸垂力)이요, ‘여러 가지 기계에 매달려 하는 운동’이 현수운동(懸垂運動)이며,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처럼 ‘쇠밧줄을 매달아 세운 다리’가 현수교(懸垂橋)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 시정 연설 뉴스에서 각 언론매체들이 플래카드와 현수막을 혼동해 쓰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옆으로 걸어 두는 막을 ‘현수막’이라 하게 되면 이러한 말들의 의미 체계가 흔들리게 된다. ‘플래카드’와 ‘현수막’은 의미 분화를 위해서도 구별해 써야 할 말이다. 따라서 ‘현수막으로 순화’라는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는 마땅히 삭제되어야 한다. 몇몇 신문에서 ‘플래카드’를 ‘펼침막’으로 쓰고 있는데 ‘현수막’은 ‘드림막’으로 했으면 한다.

류영남 전 한글학회 부산지회장
#눈#플래카드#현수막#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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