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진석]‘상(相)’을 짓지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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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은 우리 마음속의 틀, 좁은 틀로 세상을 보면 한쪽만 접하게 돼
‘상’을 짓는 건 내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는 일… 자유 평화 평등도 ‘상’에 갇혀
‘주의’가 되면 악마를 부르는 호루라기일 뿐
루쉰이 말한 ‘아Q’ 성찰 되새겨 나만의 생각에 갇히지 말아야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절에 갈 때마다 항상 듣는 말이 있다. “상(相)을 짓지 말라.” “성불(成佛)하십시오.” 여기서 ‘상(相)’은 마음속에 스스로 지은 틀이다. 보통은 누구나 이 틀을 통해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 자신의 의견이나 관점도 대부분은 이 틀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상을 짓지 말라’는 말은 자신만의 틀로 세상과 관계하면 전혀 이롭지 않다는 경고다. 왜냐하면 세상은 넓고 복잡하며 유동적인데, 좁고 굳은 틀을 갖다 들이대면 세상의 진실과 접촉하지 못하고 넓디넓은 세상의 좁다란 한 부분만 접촉하거나 유동적인 세상의 굳은 한쪽만을 지키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넓은 것을 좁게 보고, 움직이는 것을 정지한 것으로 보면 이롭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의 진실이 아니라 자신이 정해 놓은 진실을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일을 ‘상을 짓는다’고도 하고 ‘소유(所有)한다’라고도 한다. 그래서 ‘상’을 짓지 말라는 말은 ‘무소유(無所有)’하라는 말과 같아진다. ‘상’을 짓지 않거나 ‘무소유’하면 진실을 접촉할 수 있다. 세계의 진실을 접촉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판단이나 결정을 그 흐름에 맞게 할 수 있으므로 성공한다. 그 흐름에 맞추지 못하면 실패하고 패망할 수밖에 없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크고 강한 존재가 바로 부처다. 부처는 세상은 한순간도 멈춤이 없고 고정된 뿌리를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세상의 진실은 이러하다. 그래서 한 생각이나 한 대상에 밀착하는 행위인 집착(執着)이 가장 헛된 일이다. 헛된 생각과 헛된 행위로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상’을 짓지 않음으로써 헛된 생각과 헛된 행위만 벗어날 수 있으면 그 순간 부처가 된다.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상’을 짓지 않으면 부처 정도의 큰 사람이 되고, 부처 정도의 큰 성취를 이루려면 ‘상’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다른 가르침에서 추앙하는 성인(聖人)도 이에 가깝다. 결국 가장 큰 인격은 자신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는 사람이다. 경청(傾聽)이 중요한 이유다.

‘상’을 튼튼하게 가진 사람은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이며 가벼이 덤비고 고집스럽다. 게다가 세상이 자신의 ‘상’과 다르게 돌아갈 때, 자신의 ‘상’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한다. 자신의 조국 중국의 패망을 보고 한탄하다가 구국의 길에 들어선 루쉰(魯迅)은 패망의 원인을 우선 중국인의 정신이 열등해진 것에서 찾았다. 그 열등성이란 바로 실력이 없어 당한 것이면서도 그 파멸의 상황을 애써 외면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진 것은 아니라고 정당화하는 점이었다. 이것을 ‘정신승리법’이라고 한다.

아편전쟁으로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도 어떤 부류의 중국인들은 물질문명에서는 졌지만 정신문명이나 도덕성은 중국이 서양에 앞서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도 구체적인 사실을 왜곡하여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유형의 패배주의적 인간에게 루쉰은 ‘아Q(阿Q)’라는 칭호를 붙였다. ‘아Q’는 패배주의적 심리 상태 속에서 큰 능멸을 당하고도 마음속으로는 이겼다고 자위한다. 이긴 것으로 자위하려면 돌아가는 판을 자신의 ‘상’에 맞춰 멋대로 해석하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본다. 옆에서 악마가 자라고 있어도 그것은 다른 악마에 대항하려는 것이지 자신과 같이 선한 사람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게다가 자신이 맘만 먹으면 제압할 수 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고 허풍도 친다. 내 안에 ‘아Q’는 없는지 항상 확인이 필요하다.

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말도 ‘상’에 갇히면 추하고 악하고 비효율적이다. 행복, 자유, 평등, 평화, 봉사, 독립, 깨달음 등등, 다 좋은 말들이지만 항상 좋기만 하도록 태어나지는 않았다. 뿌리를 고정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맞춰 유동성을 발휘할 때만 좋은 의미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평화도 자신의 ‘상’ 속에 갇혀 ‘주의’가 되면, 악마를 부르는 호루라기가 될 뿐이다. 깨달음도 자신의 ‘상’ 속에 갇히는 순간 그저 완고한 고집으로 전락한다. ‘상’을 따라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일은 ‘아Q’가 걷는 실패의 길이다. 성공하고 싶으면 ‘상’을 걷어내고 보이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과학적 태도와 친해야 한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
#불교#상(相)#상을 짓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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