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하종대]미치광이 협상 전략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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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가 화내면 말릴 수가 없다. 그는 핵무기 단추에 손을 얹고 있다.” 미국의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해 ‘공포의 핵 위협’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닉슨은 이를 공산권에 흘린 뒤 동아시아와 유럽, 중동에 주둔하는 옛 소련 국경 부근의 미군에 핵전쟁 경계령을 내렸다. 누구도 감히 언급하지 않는 핵전쟁을 언제든지 불사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베트남전쟁엔 먹히지 않았지만 이는 소련을 압박해 냉전을 서방세계의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닉슨의 이런 ‘미치광이 외교’의 원조는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한다. 반공 포로 석방 등 이 대통령의 독자 행동으로 골치를 앓던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리처드 닉슨 부통령을 보내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미국이 이승만을 통제할 수 있다고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순간 귀국(貴國)은 중요한 협상력 하나를 잃게 된다”며 거절했다. 닉슨은 회고록에서 “이승만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적었다.



▷상대가 자신을 미치광이로 보게 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전략을 ‘미치광이 이론(Madman Theory)’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예측불가능성을 최대한 높여 불안에 빠진 상대가 양보하도록 하는 협상기술이다. 이는 누군가 피하지 않으면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는 ‘겁쟁이(chicken) 게임’에서 더욱 효과를 발휘한다.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를 언급하며 핵 공격까지 경고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나 괌 주변을 미사일로 포위사격하겠다며 맞선 북한의 김정은 역시 노리는 것은 상대의 양보다.

▷사실 ‘미치광이 전략’보다 더 무서운 건 말하지 않고 행동부터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나라가 이스라엘. 자국에 위협이 되는 시설이나 인물들은 사전경고 없이 날아가 폭격하거나 제거해 버리곤 했다. 말만 앞세우던 북한의 ‘미치광이 전략’은 국제적 비웃음을 샀지만, 어느새 소형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까지 왔다. 졸면 죽는 세계다.
 
하종대 논설위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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