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상훈]김동연 부총리 앞에 놓인 ‘함정’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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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경제부 차장
이상훈 경제부 차장
“부총리가 휴가를 일정대로 떠났다면 그거야말로 관료사회에서 뉴스가 됐을 겁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했다는 소식에 한 경제부처 관료는 이렇게 말했다. 그 정도로 김 부총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워커홀릭(일중독자)이다.

이전에도 김 부총리의 휴가 반납은 그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시그너처 이벤트’였다. 2011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남유럽 재정위기가 닥쳤으니 내년 예산편성 기조를 전면 재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기재부 예산실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 부총리는 즉시 휴가를 취소하고 예산안 재검토에 착수했다. 국무조정실장 시절인 2013년 아들을 위해 골수이식 수술을 하느라 병가를 낼 상황이었지만 다음 날에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 참석해 현안 보고에 나서기도 했다.

북한 미사일 발사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예정대로 휴가를 갈 정도로 일과 여가의 양립을 추구하는 게 문재인 정부의 기조다. 그런 상황에도 김 부총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휴가 첫날 “중요한 보고가 있어서 잠시 사무실에 나왔다”는 글을 올리며 휴가 반납을 알렸다. “제가 하는 일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고 언급한 대목에서는 큰 각오를 다진 듯한 결기마저 느껴진다. 최근 중요 경제정책 논의 과정에서 부총리가 소외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이른바 ‘김동연 패싱’이 거론되자 이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김 부총리와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는 관료들은 “부총리가 요즘 같은 상황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립(조직 장악력)이 강하다’ ‘논리와 신념으로 반대 의견을 과감하게 제압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늘의 자리까지 온 김 부총리다. 여당 지도부와 정치인 출신 장관들의 말에 따라 자신의 경제정책 구상이 하루아침에 뒤집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김 부총리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 이달 말 마무리되는 내년도 예산안 편성은 김 부총리의 전공 분야다. 의도치 않게 부총리가 조연에 머물렀던 세법개정안, 부동산 대책과는 다르다. 예산실장 출신 차관도, 현직 예산실장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 내년도 예산안 편성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사람은 김 부총리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휴가에도 출근해 예산안을 챙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려도 생긴다. 누구보다 예산 정책에 전문성이 있는 김 부총리는 예산을 활용한 다양한 정책 플레이에 강점을 보였다. 좋게 보면 정책 홍보이지만 달리 보면 ‘자기 정치’다. 예산실장 시절 사상 최초로 ‘찾아가는 예산실’을 가동해 부처 위에 군림한다는 불만을 일거에 잠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와중에 장애아동 부모를 사무실로 불러 위로하며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장애아동 가정에 양육수당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해 홍보 효과를 극대화했던 김 부총리다.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시간에 쫓기는 김 부총리가 내년도 예산안으로 자기 정치를 해 보겠다는 유혹에 걸려들 수 있다는 것이다. 허수아비 부총리라는 지적을 듣지 않기 위해 ‘이미지 세탁’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김 부총리가 빠질 수 있는 최악의 함정이다. 국민들은 그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나라 경제의 미래를 보며 뚜벅뚜벅 걸어가길 기대한다. 새 정부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재정 건전성과 시장경제 원칙의 중요성을 되새겨줄 사람은 ‘경제 컨트롤타워’ 자리에 있는 김 부총리밖에 없다.

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
#김동연#예산안 편성#경제 컨트롤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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