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블라인드 채용’ 민간도입 법제화… 시장경제 맞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4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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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하반기부터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 채용 때 학력 출신지 등을 보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이 실시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공정한 채용을 강조하며 “민간 쪽은 법제화되기 전까지는 강제할 수 없지만 민간 대기업들에도 (블라인드 채용을) 권유하고 싶다”고 밝혔다. 공공채용 실천 방안 마련, 블라인드 채용을 민간으로 확산하기 위한 가이드북 제작, 채용절차법 개정을 통한 법제화 등이 정부가 생각하는 채용 구조개혁 로드맵이다.

출신 대학이나 가정형편과 상관없이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은 공정한 기회 보장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가 만든 채용 원칙을 민간이 도입하도록 압박하고 제도화까지 하겠다는 발상은 계약의 자유를 중시하는 민법상 사적자치 원칙, 경제활동의 자유를 존중하는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인재를 선발하고 배치하는 과정은 기업의 존망과 직결된 문제다.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기업은 자기 회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뽑는 데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블라인드 채용으로 이력서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사라진다면 기업으로서는 정보 부족으로 적임자 선발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실제 능력과 상관없이 지원자의 임기응변이나 면접관의 인상 비평이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다.

정부가 만든 가이드북이나 표준이력서를 민간에 권유한다는 대통령의 말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기업은 별로 없을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으로 사람을 뽑으려면 직무적성을 검증하는 별도 시험이나 심층면접 절차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부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은 이런 평가를 자체적으로 준비할 만한 여력이 없다. 결국 정부가 만든 직무능력 중심 채용 시스템인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제도를 민간이 가져다 쓰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개별 기업마다 직원에게 요구하는 직무적성이 다른 현실에서 표준화된 평가 방식으로 획일화된다면 기업이 원하는 창의력과 업무능력을 가진 인력을 뽑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삼성 롯데 KT SK텔레콤 등 대기업들은 수년 전부터 자발적으로 스펙을 초월한 채용제도를 도입했다. 우리 채용 문화에서 주된 개혁 대상은 채용 청탁과 고용 세습 등에 찌든 공공기관이지, 효율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민간이 아니다. 정부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채용 과정에 끼어드는 것은 관치 중에서도 가장 후진적인 관치다.
#블라인드 채용#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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