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상훈]40조 원짜리 청구서가 날아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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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경제부 차장
이상훈 경제부 차장
이번 5·9대선은 여러모로 낯선 일이 많았다. 우선 국민 모두 살림살이가 어렵다고 하소연했는데도 역대 어느 대선보다 경제 이슈가 부각되지 않았다. 그 대신 유력 후보들의 공약은 적폐 청산, 좌파 척결 등 이념논쟁에 초점이 맞춰졌다. 대통령 탄핵으로 열린 사실상의 보궐선거라는 특성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공약집 뒤편에 구색 맞추기로 배치된 경제 공약은 아쉬움이 남는다. 게다가 이들 공약에서 구체성이나 실현 가능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공공 일자리 81만 개 창출이나 유류세 절반 이하 등과 같은 논쟁적인 공약을 두고 벌어진 토론에 유권자들이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두지 않은 것도 이런 분위기를 부추겼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전국 4200만 명 유권자 앞에 배달될 ‘공약 청구서’를 감안하면 경제 공약에 대한 검증 작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유력 후보들은 공약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40조 원 안팎이 들 것으로 얘기하고 있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재정이 들어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기대수명을 어떻게 가정(假定)하느냐에 따라 연간 수조 원의 기초연금 예산이 늘기도 줄기도 한다.


돈 쓸 곳이 많아질 때 재원 마련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빚을 늘리거나 세금을 더 거두는 것이다. 씀씀이를 줄여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의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사실은 박근혜 정부의 ‘공약 가계부’로 확인됐다. 국가부채를 늘려 복지를 확대하는 건 그리스행 급행열차를 타는 일이다. 결국 방법은 증세(增稅)밖에 없지만 유력 후보들의 공약에서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득표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아 포함하지 않았다”고 밝힌 일부 후보들이 있었지만 “청구서를 감추는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듣기 어려웠다.

국부(國富)를 팔지 않는 한 나라가 곳간을 채우는 방법은 기업과 가계를 살찌우는 것이다. 하지만 유력 후보 누구도 어떻게 경제를 성장시킬지에 대한 공약은 내놓지 못했다. 모처럼 주요 경제지표가 좋아졌기 때문일까.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고 경제부총리가 자화자찬했지만 그래 봤자 분기 성장률이 1%에도 미치지 못했다.

혹자는 “요즘 누가 성장률 몇 퍼센트 공약을 내놓느냐”고 말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연 3% 성장률을 약속했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020년까지 국내총생산(GDP) 600조 엔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변변한 성장 목표 하나 없이 추상적 슬로건만 내세우는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달콤한 선심성 공약만으로 경제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하다. 이제부터라도 연 40조 원짜리 공약 청구서를 내밀 새 대통령에게 ‘이 돈을 마련할 성장 해법은 무엇인가’라고 유권자들이 물어봐야 한다. 선진국이라고 비장의 무기가 있는 게 아니다. 과감한 규제 철폐, 고용을 유도할 합리적인 노동개혁, 적극적인 해외투자 유치 등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

대통령의 5년 뒤 성공과 실패는 모두가 알고 있는 해법을 실천에 옮겼는지 여부가 판가름할 것이다.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고 북한의 핵 위협으로 고조된 일촉즉발의 위기를 해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민들 피부에 와 닿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경제 살리기다. 만성 저성장 구조와 고용절벽의 위기를 깨고 활력이 넘치는 경제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내일 우리가 맞이할 새 대통령이 풀어야 할 숙제다.

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
#5·9대선#공공 일자리#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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