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老전사의 대선 출마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0일 03시 00분


코멘트
1170년 고려 왕 의종이 보현원이라는 절에 가는 길에 무신(武臣)들에게 수박희(手搏희)를 하라고 명했다. 손으로 상대를 때리는 수박희는 나중에 태껸으로 발전한 군사무예였다. 대장군 이소응이 패하자 문신(文臣) 한뢰가 뺨을 후려쳤고 이소응은 댓돌 아래로 떨어지는 모욕을 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문벌귀족들이 최고 군사지휘권까지 잡아 무반이 천시를 당하는 시대였다. 정중부 등 무신들은 곧바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100년간 이어진 무신정권의 시작이었다.

▷“뭘 모르는 문신들이 (무신들을) 무시하고 홀대하니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2004년 8월 한 육군 인사가 이 말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국방부 본부 문민화’와 육해공군 균형 발전을 추진해 육군 장성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 발언을 했다고 지목된 인사가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기무사령부 등의 조사 결과 사실무근으로 드러났지만 반(反)개혁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남 총장에게는 안보와 반공, 애국이 ‘종교’였다. 청렴과 강직, 충성은 행동수칙이었다. 별을 달고서도 ‘생도 3학년’의 자세를 유지했다는 그다. 노무현 정부와의 충돌은 예정된 일이었다. 그는 육군 준장 진급 심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으로 수사를 받게 되자 사표나 다름없는 전역지원서를 내 맞섰다. 가까스로 임기를 마치고 전역한 뒤에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군 병력 감축, 복무기간 단축 등에 앞장서 반대했다.


▷2013년 남재준의 국가정보원장 취임 일성은 “전사(戰士)가 될 각오가 돼 있다”였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격 공개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수사 등이 ‘종북 척결’의 실적이다. 올해 73세인 그는 17일 “지금 동북아 정세는 구한말 같고, 국내 상황은 월남 패망 직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앞서 한 인터뷰에서는 “최순실을 알았다면 권총이라도 들고 청와대에 갔을 것”이라고 결기를 보였다. 그가 또 다른 전쟁에 나선 것은 ‘노무현 시즌2’를 막겠다는 노병의 마지막 안간힘인 듯하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남재준#국가정보원장#이소응#정중부의 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