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정자]일상성과 혁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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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층이 처음 거리로 나섰다… 그 당당하고 잘난 젊은이들, 누가 공부시켰나 묻지 않았다
혁명은 하나의 축제… 축제가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세계경제 10위권 대한민국 일군 노년층은 ‘일상성의 세대’… 영원히 지속되는 삶을 은유한다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시커먼 구름 뒤엔 새하얀 구름 숨어 있으니’, ‘화와 복은 서로 겹쳐져 있고(禍福相倚)’,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니, 전화위복(轉禍爲福)일 것이며, ‘결국 패한 자가 이기리라(Qui perd gagne)’.

극에 달하면 뒤집어져 정반대로 넘어간다는 서양의 변증법과 동양의 주역 원리를 되새기는 일주일이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을 괄호 안에 넣고 일체의 정치적 판단을 중지한 채 탄핵 사태를 무심하게 바라보면 거기에 아주 놀랍고도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있다. 거리로 쏟아져 나와 광장을 가득 메운 거대한 노년층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온 세계가 깜짝 놀랄 사상 초유의 사태이다. 젊은 세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처음엔 ‘최순실 돈’으로 나왔느니, 노숙인들이 돈 받고 나왔느니, 배우지 못한 가난한 노인들만 나왔느니 하고들 분분하게 해석하였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기본 이념으로 삼는다는 세력이 때만 되면 상대편을 ‘저학력, 빈곤층, 노년’ 등의 프레임으로 매도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그나마 그것도 팩트는 아니었다. 배우지 못한 가난한 노인이기는커녕 과거에 대학교수, 대기업 사장, 고위 공무원, 외교관, 언론인 등을 지냈던 고학력의 여유 있는 계층이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 대거 참여하였다. 그야말로 계층을 초월한 노년 세대 전체의 봉기였다. 더군다나 기본적으로 그들은 집단 시위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였다.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집회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세대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혁명 세대가 아니라 일상성의 세대였다.

혁명과 일상성을 대립항으로 놓았던 것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였다. 일상성은 산업사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행태다. 언제나 반복되는 지루한 업무, 모욕적인 인간관계, 남들은 모두 잘나가는데 나만 영원히 뒤처져 있는 듯한 무기력감… 요컨대 일상성은 궁핍, 결핍, 박탈, 억압,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연속이다. 이 무미건조하고 비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축제를 벌이거나 모험을 하거나 여행을 떠난다.

일상과의 단절이라는 점에서 혁명 역시 하나의 축제다. 혁명은 단순히 구시대의 정치·경제 제도를 전복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사건만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모든 사회적 강제를 폭파시키면서 일상성에 종지부를 찍는다. 혁명은 잔인하고 축제는 즐겁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파괴와 일탈,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축제 역시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모든 혁명은 결국 축제의 복원이다. 지나간 시대의 혁명들은 모두 축제였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면 다시 지루한 일상이 찾아오듯 혁명은 어느새 제도와 관료주의라는 타성태(惰性態)의 일상으로 회귀한다. 축제든 혁명이든 모든 다이내믹한 것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무심한 듯 힘없이 완만하게 제 갈 길을 가는 이 완강한 지속성이야말로 일상성의 위대함이다. 묵묵하게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일상성은 땅에 뿌리박고 영원히 지속되는 인간의 삶을 은유한다.

데모가 매일같이 반복되던 1980년대에 학생들이 던진 돌로 뒤덮였던 거리가 다음날 아침 출근 때면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이제 더 이상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대학생들이 허구한 날 유리창을 깨부수고 화염병을 던지던 시절, 아스팔트에 널린 무수한 돌멩이와 유리 조각을 매일 새벽 묵묵히 치우고, 공장에서 생산하고, 해외에서 물건 팔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세대가 지금의 노년층이다. 하루도 빼지 않고 서울의 어느 길에선가 늘 데모가 있던 나라, 그 80년대를 지나면서도 꾸준히 나라를 발전시켜 세계 경제대국 10위권의 나라가 되게 만든 세대다.

그들이 혁명의 방식으로 거리에 나섰다. “늙은 년, 놈들”이라는 욕이 기본으로 깔린 젊은이들의 댓글을 묵묵히 보면서…, “자식들은 유학, 해외여행, 인터넷을 통해 발전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는데 아직 개발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늙은이들”이라는 조롱의 말에 한마디 토도 달지 않은 채…. ‘굳이 그 당당하고 잘난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고, 해외여행 보내주고, 인터넷을 공부하게 해준 것은 누구였던가?’라고 묻지 않으며, 다만 고목에 새싹 돋듯 파릇하게 생겨난, 아직은 극소수인 젊은 보수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탄핵#일상성#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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