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파리 테러에서 본 선진국 언론의 모습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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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하면 영화에서는 늘 연애나 하고, 거리에서는 매일같이 온갖 직종의 사람들이 데모나 하는 유약한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번 파리 테러 사건은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 국가 이미지를 단숨에 바꿔 놓았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132명이 사망한 테러 사건을 ‘범죄’가 아니라 ‘전쟁’으로 규정하고 즉각 보복 조치에 나섰다. 범죄가 아니라 전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테러리스트가 재판에 회부될 시민이 아니라 현장에서 즉각 사살해야 할 적군으로 간주된다는 의미이다. 외부적으로는 핵추진 항공모함 샤를드골함을 지중해에 파견하여 시리아 연안에 배치했고, 라팔 전투기와 미라주 전투기 등 최신예 전투기 38대로 시리아와 이라크의 이슬람국가(IS) 본거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무서운 굉음의 전투기와 거대한 핵추진 항공모함은 온 국민이 연애만 하고 살 것 같은 나라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들이었다. 테러 용의자의 은신처를 하루 이틀 만에 정확히 파악하여 용의자 3명을 사살하거나 자폭시키는 데 5000여 발의 총을 쏘았고, 건물 하나를 거의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정확한 정보력, 단호함, 그리고 치밀한 응징은 거의 전율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역시 프랑스는 세계 최대 강대국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우쳐 주는 순간이었다.

올랑드의 강경한 대응 앞에서 900여 명의 상하 의원들은 여야 구분 없이 ‘라 마르세예즈’ 합창으로 지지를 보냈고, 평소 아랍 이민정책에 반대했던 극우정당 국민전선(FN)도 대통령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놀라운 것은 국민의 자세였다. 농민들은 걸핏하면 수확한 곡식이나 과일을 고속도로에 싣고 와 쏟아 버리는 시위를 하고, 도시 고속철과 지하철은 다반사로 파업하여 교통대란이 일어나는 나라가 프랑스였다. 교사와 약사, 의사들까지 어느 직종 하나 가만히 있지 않고 늘 데모로 일을 해결하여, 마치 온 국민이 자기 이익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한, 극도의 이기주의와 자유분방함이 팽배한 나라였다. 그런데 테러가 일어나자 파리 시민들은 거리에서의 불심검문이나 영장 없는 가택수색 같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 불평 없이 양처럼 순하게 복종했다.

더 놀라운 것은 언론의 자세였다. 사건 직후 우리가 TV 뉴스에서 본 것은 축구 경기장에서 폭발음이 들렸을 때 선수들이 잠시 멈칫한 것, 관중석에 앉아 있던 대통령이 언뜻 보였던 불안한 표정, 경기장을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하며 질서정연하게 빠져나가는 관중, 그리고 테러리스트 은신처에 대한 무자비한 소탕 작전 등 지극히 질서정연하게 통제된 몇 개의 화면뿐이었다. 우왕좌왕하는 무질서한 군중의 모습이나 선혈이 낭자한 폭력적인 장면, 또는 억울하게 죽었다고 땅을 치며 통곡하는 희생자 가족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비친 적이 없다. 관중에게 아무 고지도 하지 않고 대통령만 먼저 빠져나갔다고 지적하는 언론은 한 군데도 없었으며, 테러 현장에 자칭 타칭 기자들이 1000여 명 달려들어 중구난방의 미확인 정보를 쏟아내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정부는 그 어떤 정책도 자신 있게 추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위기가 닥치면 일체의 선정성을 자제하고, 정부의 이성적인 통제에 자발적으로 협조하는 언론, 이것이 바로 선진국 언론의 모습이었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파리 테러#is#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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