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中 톈안먼에 선 박 대통령, ‘北변화’ 국제공조 끌어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4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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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전승절)’ 행사는 경제대국 중국의 군사굴기(굴起)를 내외에 과시한 역사적인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중국은 핵탄두를 탑재해 미국 본토까지 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둥펑-31A와 미 태평양 항공모함 전단에 위협적인 신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둥펑-21D 등 자국산 최첨단 무기를 대거 공개했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에 무너졌던 굴욕적 과거를 딛고 도광양회(韜光養晦·힘을 감추고 때를 기다림)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주요 2개국(G2)으로 떠오른 중국의 사상 최대 규모 열병식을 49개국의 지도자들이 톈안먼 성루에 올라 지켜봤다. 60여 년 전 북한 김일성이 섰던 그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이를 참관했다.

시 주석은 “중국은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패권주의를 추종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군 규모를 30만 명 감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의식한 발언이지만 서방에서는 군사력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미국과의 패권전쟁에서 밀리지 않고 핵심 이익을 관철하겠다는 다짐이라면 동북아 군비경쟁과 먹구름은 한층 심각해질 우려가 있다.

부상(浮上)하는 중국, 지도력을 재구성하는 미국, 정상화를 추구하는 일본, 복귀를 희망하는 러시아, 그리고 불안정한 북한. 동아시아의 지정학과 국제정치는 이렇게 요약된다. 전승절 하루 전인 2일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의 항복 문서에 서명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종전으로 새로운 장이 시작된 미일관계는 화해의 힘을 보여주는 모델”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날 시 주석과 13번째 정상회담을 가진 푸틴 대통령은 “아시아에 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뒤집으려는 국가가 있다”고 일본을 비난함으로써 더욱 견고해진 미일동맹에 신(新)밀월 관계의 중-러가 맞서는 장면을 연출했다.

중국이 경제 규모에서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는 2020년경부터 미중 국방비 규모가 유사해지는 2030년 중반까지 G2는 전략적 경쟁과 협력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미중 갈등 국면에서 최대한 국익을 챙겨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하고 있다. 한국은 100년 전처럼 강대국 사이에 낀 ‘새우’가 될 수도 있고, 북중러-한미일의 냉전 구도를 깨고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를 화해와 협력으로 이끄는 새로운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톈안먼 성루에서 중국군을 사열한 박 대통령의 모습을 온 국민이 주시한 이유다.

박 대통령은 한미동맹 못지않게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인 중국과의 우호 증진도 중요하다는 현실적 판단에 따라 방중(訪中)의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불편한 시선을 무릅쓴 탓에 미국의 핵심 동맹인 한국이 이제 중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중국 경도론(傾倒論)이 현실화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 북한 핵문제 해결과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서도 중국의 건설적 역할이 필요한 만큼, 박 대통령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아래 국익을 위한 외교의 당위성을 우방에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전승절 행사는 변화하는 북-중 관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과거 김일성이 두 번이나 마오쩌둥 바로 옆에서 열병식을 참관한 톈안먼 성루에 이번엔 최룡해 노동당 비서만 첫줄 맨 가장자리에 섰을 뿐이다. 끝내 불참한 김정은은 박 대통령이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열병식에서도 깍듯한 예우를 받는 모습을 보며 빛바랜 북-중 관계에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꼈을 법하다. 한중 정상이 공감한 6자회담 재개에 응하고 핵을 포기하는 선택을 통해 이제는 김정은의 북한도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

올 연말까지는 정상외교 시즌이다. 다음 달 16일 한미 정상회담에 이어 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리고 박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첫 정상회담도 성사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 체제를 다지고, 역사 왜곡 문제로 얼어붙은 한일 관계도 복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박 대통령은 동맹과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면서 유연하고도 실리적인 접근으로 국익과 동북아 신질서를 위한 외교를 주도해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이 시 주석의 호화판 잔치에서 분위기를 살리는 손님 역할을 한 데 그치지 않고 한국 외교의 새 지평을 확실히 열기 위해선 지금까지를 뛰어넘는 역량과 전략이 절실하다. 반공을 외치던 가장 보수적인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1972년 중국을 방문해 데탕트 시대를 열 수 있었듯이, 박 대통령의 이번 방중이 북한을 핵 포기와 개혁 개방으로 유도하는 국제공조를 이끌어내기 바란다.
#톈안먼#박근혜#국제공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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