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고려나전과 버킨백에 담긴 장인정신

동아일보
입력 2015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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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 홍보전문가 서맨사가 이 핸드백을 사기 위해 스타 이름을 빌렸다 망신당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개당 1000만 원대에서 억 단위까지 훌쩍 넘어가지만 대기 명단이 워낙 길어 돈만 가지고는 사기 힘든 탓이다. 가방 이름은 영국 가수 제인 버킨의 이름을 따서 만든 ‘버킨백’. 최근 버킨이 악어백에 필요한 가죽을 얻는 과정에서 자행된 동물 학대에 충격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해 화제가 됐다.

▷버킨백은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이름을 딴 ‘켈리백’과 더불어 1837년 창립된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를 상징한다. 이 회사에선 버킨백은 물론이고 넥타이 같은 소품을 만들 때도 장인정신을 중시한다. 누구의 손길에서 탄생했는지 제품에 표시하는 것도 장인의 존재감을 조명하기 위해서다. 영국 신문 가디언에 따르면 에르메스 장인 1명의 경제적 가치는 50억 원에 이른다.

▷서울 리움미술관의 ‘세밀가귀 細密可貴: 한국미술의 품격’전에 가면 우리나라 옛 장인의 혼이 담긴 나전을 볼 수 있다. 12세기 중국 송나라의 사신이 고려 나전을 보고 “세밀함이 뛰어나 가히 귀하다 할 수 있다”고 말한 데서 제목을 따왔다. 자체 소장품과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 국내외 40여 곳에서 모은 도자, 회화 등 많은 유물 중 고려 때 나전경함은 눈부시게 찬란하고 극한의 정교함을 뽐낸다. 전통미술의 특징을 ‘소박함’만으로 좁게 해석하는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는 기회다.

▷고려 왕실은 나전 장인에게 각별한 공을 들였다. 관영 공예품제작소(中尙署)의 녹봉 체계에 따르면 1년에 300일 이상 일하는 조건으로 나전장은 7석을 받았다. 한 해 어른 1명이 소비하는 쌀을 1석으로 치는데 일곱 명이 충분히 먹고살 만한 양식을 연봉으로 챙긴 것이다. 나라의 전폭적 지원에 나전장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최고의 명품으로 보답했다. 유교가 지배한 조선시대 들어 기술을 낮춰 보면서 고려 나전의 예술적 미를 완성한 장인의 숨결과 위엄도 사그라들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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