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영토를 뒤덮은 지도(地圖)’의 우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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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
고대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
대제국의 지도 제작자들이 극도로 정밀한 지도를 제작했는데, 너무나 상세해서 실제 제국의 영토를 거의 정확히 뒤덮어 버릴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지도인 줄도 모르고 그 위에서 살았다. 마침내 제국이 망하자 사막으로 변한 땅에는 너덜너덜 누더기가 된 지도 조각만이 나뒹굴었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일컬어지는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의 단편 중 ‘과학의 정밀성에 대하여’라는 한 문단짜리 짧은 소설에 나오는 우화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우화 중의 하나이다.

지도란 실제의 영토를 몇만분의 1로 축소하여 그린 이미지 자료이다. 축도(縮圖)의 비율이 낮아질수록, 다시 말해 몇천분의 1, 몇백분의 1로 내려갈수록 지도는 점점 더 세밀하게 되어 실제의 땅과 비슷해질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 대 1의 비율이 되면 거대한 지도는 실제의 영토를 정확히 뒤덮게 될 것이다. 그때 영토와 지도는 더이상 구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지가 완전히 실재를 뒤덮어 버린 현대 사회의 더할 나위 없는 은유이다.

요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음식점에 가면 요리 사진을 찍고, 자기 얘기를 시시콜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올린다. 그 빈도수가 점점 빨라져 1초 단위로 내려간다면 글자 그대로 실생활을 뒤덮는 가상의 현실이 될 것이다. 과연 노르웨이의 한 TV 방송은 달리는 열차나 유람선에서 보이는 풍경을 특별한 편집 없이 그대로, 짧게는 수시간에서 길게는 100시간 넘게 방영하는 야심 찬 기획을 했다. “스마트폰만 가지고는 살 수 없잖아요. 누구나 마음속엔 느리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죠”라고 해당 프로의 PD가 말했다지만, 사람들은 10시간이 넘는 그 프로를 모두 스마트폰으로 보고 있었다. 이건 슬로 라이프의 문제가 아니라 영토를 뒤덮는 지도의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현실을 그대로 촬영하고, 여실하게 글로 묘사했다 해도 사진이나 영상, 혹은 글은 실재의 반영에 불과하다. 실체가 없으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지이고, 가상현실이다. 그런데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독자 혹은 TV 시청자는 이 가상현실을 실재로 받아들인다. 과거에는 이미지가 실재의 반영이었지만 현대의 이미지는 그 어떤 실재도 반영하고 있지 않다. 원본 없는 복제품, 이것이 바로 현대 인문학의 키워드인 시뮐라크르이다. 연예인의 맑고 깨끗한 이미지가 과연 그의 실재와 일치하며, 정치인의 품격 있는 도덕성이 과연 그의 실재일 것인가? 원본 없는 복제품인 그 이미지들을 우리는 실재인 양 착각하며 일희일비하고 있다. 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고, 가상이 현실을 대체하는 현상이다.

이미지는 단순히 실재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실재보다 더 실재 같아 보인다. 소위 하이퍼리얼(hyperreal)이다. TV 리얼리티 쇼에 나오는 연예인 자녀들의 일상적인 생활상, 혹은 외딴 시골집에 가 밥 지어 먹는 연예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보인다. 그것이 철저하게 준비된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시청자들은 모르거나 혹은 모르는 척하고 즐긴다. 실재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리얼은 사라지고 리얼이 아니면서 리얼보다 더 리얼한 하이퍼리얼이 대신 들어섰다.

지도에 뒤덮인 제국이 결국은 파괴되고 썩어 없어졌다는 보르헤스의 우화가 조금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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