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68>꽃 핀 나무 아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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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핀 나무 아래 ―주원익(1980∼ )

우리가 마지막으로 내뱉어야 했던
관념의 오물들이 관념으로 뒹굴고 있다
흰빛,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그것은 때때로 달아나고 미소 짓고 불을 가져온다
강물은 낮을 가로지르고 밤을 위해 잠들었다
돌무더기를 끌고 발자국을 지우며 물소리
들리지 않는 그곳으로 우리는 쓰러져야 했다
쓰여져야 한다 버려진 문장들은 구름의 뼈를 부수고
세상의 빈약한 나뭇가지를 부여잡을 것이다
들판을 거닐다가 굶주린 갈까마귀처럼
우리가 마지막으로 더럽혀야 했던 오지에서
꽃 핀 나무들이 자라나고 흰빛,
헤매고 충돌하는 유령의 관념들아
우리가 처음 버려져야 했던 우리처럼 떨어진다,
그곳으로 떨어지고 있다


나뭇가지에서는 귀부인처럼 뽀얗던 꽃이 누렇게 찌든 휴지처럼 뒹구는, 목련나무 아래 풍경 같다. 이 시를 옮긴 주원익 시집 ‘있음으로’는 시에 대한 한 권의 로망스다. 이 사랑은 ‘한 편의 시’를 씀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그 한 편의 시를 향한 작업은 뭇 남녀의 ‘작업 걸기’와 다름없을 테다. 시집 속의 시인은 시에 대한 집요한 탐색으로 창백해져 있다. 아, 이토록 단정하고 서늘하게 문장을 다루는 시인이 왜 다짜고짜 시를 쓰지 않고 시에 대한 탐색으로 시종하는 것일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더럽혀야 했던 오지’는 서정(抒情)이 아닐까? 서정을 잃고 나는 쓰네…. 서정, 곧 실체를 잃은 시를 뒤쫓는 지난함이여, 허망함이여.

근사한 서정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이 젊은 시인에게 윌리엄 아이리시 소설 ‘환상의 여인’에서 발견한 시 한 토막을 들려주고 싶다. ‘아무도 두드린 적이 없는/미래파의 리듬/귓가에서 고막 곁에서/이 드럼이 울리면/옆으로 쓰러뜨려지리’.

주원익 당신은 시 ‘거울’에서 ‘당신은 나를 더듬는 천 개의 손가락/나는 당신을 다듬는 천 개의 눈동자’라고 했다. ‘당신’은 시일 테다. 시든 사람이든 당신의 사랑이 천 개의 손가락으로 더듬고 있을 때, 당신은 왜 눈을, 그것도 천 개씩이나 부릅뜨고 있는가. 눈을 감고 당신도 천 개의 손가락으로 다듬어야 하리라. ‘아무도 두드린 적 없는/미래파의 리듬’이 울리리.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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