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고려 문화의 재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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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풍속을 보면 아들을 따로 살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으니, 옛날 진나라의 데릴사위와 비슷합니다. 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딸이 주관하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애정을 쏟고 부지런히 돌보면서 얼른 자라나 자기들을 봉양해 주기를 밤낮으로 바랍니다.’ 고려 말 대문장가인 이곡이 원(元)에 공녀제 폐지를 요청하며 쓴 글이다. 성리학을 근본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와는 다른 여성의 지위를 엿볼 수 있다. 고려 여인들은 남편과 사별하면 재혼이 자유로웠다. 상속할 때 아들과 딸의 구분이 없었고 부모의 장례비용도 공동으로 부담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자주적 통일대업을 이룩했다. 그가 건국한 고려는 대외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과 교역하며 ‘코리아’란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거란 여진 몽골 등 숱한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면서 500년 왕조 속에서 찬란하고 눈부신 문화를 꽃피웠다. 불교를 국교로 삼아 다양한 불교 관련 문화재가 활발하게 제작됐다.

▷그제 문화재청이 서울 도봉서원 터에서 출토된 77점의 불교 용구를 공개했다. 이 중 12세기 이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제 금강령(불교의식에 사용하는 방울)은 단연 최고의 걸작으로 꼽혔다. 사천왕상과 오대명왕상이 살아있는 듯 새겨져 고려 금속문화의 정수를 볼 수 있었다. 올해 7월 국립중앙박물관이 공개한 고려나전경함의 경우 섬세하고 화려한 공예미의 극치를 보여줬다. 나전경함은 불교 경전을 담는 함. 전 세계에서 9점밖에 없는 유물 중 하나를 박물관후원회가 일본에서 구입해 기증했다.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시대, 고려에 대한 연구는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돼 있다. 1차 사료가 부족하고 주요 유적과 유물이 고려의 도읍지인 개성에 집중된 탓이다. 하지만 차츰 고려의 재발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 방한한 에드워드 슐츠 미국 하와이대 명예교수는 “고려는 외국에서 들어온 문화를 개방적으로 받아들인 뒤 토착적 요소와 잘 버무려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고려#불교#대외 교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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