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하인리히 법칙과 경고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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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욱 정치부장
정연욱 정치부장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지자 뒤늦게 “이럴 줄 알았다”고 할 만한 징후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세월호 선장의 부인은 “남편이 여러 차례 선체에 이상을 느껴 회사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묵살됐다”고 전했다. 선원들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 탱크에 문제가 생겼다”며 수리를 요청했지만 회사가 묵살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처럼 세월호 사고에 앞서 ‘빨간불’이 켜졌다는 증언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1931년 미국의 한 보험사에서 근무한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사례를 분석해 하나의 통계적 법칙을 소개했다. 이른바 ‘1 대 29 대 300 법칙’이다. 산업재해가 발생해 중상자가 1명 나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것이다. 대형 사고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얘기다. 사전 경고에만 잘 대처했더라면 대형 사고는 막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최근 쏟아지는 세월호 관련 보도를 보면 하인리히 법칙을 비켜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세월호 침몰 사고는 단순히 선체의 침몰이 아니다. 비명에 스러져간 꽃다운 청춘을 그리는 통곡의 벽에 그쳐서도 안 될 것이다. 세계 경제 10위권이라는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이 화장을 지운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다. 하인리히 법칙이 예고한 사전 경고음은 지금도 울리고 있다. 그 타깃은 공직 사회다.

사고 첫날부터 수습을 맡은 고위 공직자들은 우왕좌왕했다. 탑승객 수는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락가락한다. 사고 현장에서는 어떤 공무원도 “이번 숫자가 최종 완결판”이라고 장담을 못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탑승객 수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면 실종자 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3000개가 넘는 위기관리 매뉴얼을 자랑하고, 위기관리의 선도를 자처했건만 정작 위기의 현장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사고 수습의 첫 단추인 현황 파악조차 안 되고 있는 현실, 선진국과 어깨를 겨룬다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박근혜 대통령은 17일 진도 사고 현장을 찾아 “오늘 이 자리에서 지키겠다고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사고 수습 중인 공직 사회에 대한 엄중한 경고장이다. 하지만 울부짖는 사고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새벽에 시신을 인계받으려는 가족에게 “가족관계증명서를 떼 오라”고 요구하는 황당한 사건이 이어졌다. 그들의 눈높이에 아직 국민은 없다는 증거다.

지금도 많은 공직자는 묵묵히 제 길을 걷고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노고까지 폄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번 사고 수습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일부 공직자의 어설픈 대응은 공직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의 골만 더욱 깊게 만들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부 수립 후 민관에 걸쳐 쌓인 ‘60년 적폐(積弊)’를 척결하겠다”고 말했다. 공직사회에 대한 국민의 믿음이 없다면 개혁 드라이브는 성공할 수 없다. 삼척동자도 알 만한 순리를 외면한다면 박 대통령의 경고는 또 다른 ‘말잔치’일 뿐이다. 이번 기회에 털 것은 털고 가야 한다. 내각 총사퇴를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여권은 하인리히 법칙이 예고한 경고음을 흘려들어선 안 될 것이다. 이번 사고의 유가족은 물론이고 멍울이 맺힌 국민을 두 번 다시 욕보여서는 안 된다.

정연욱 정치부장 jyw11@donga.com
#세월호 침몰#하인리히 법칙#산업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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