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의 갯마을 탐구]〈15〉시시한 멸치 앞에 시시해진 우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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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섬의 분교를 다녔다. 운동장에서 축구할 때면 네댓 번은 바닷물에 들어가야 했다. 축구공은 나지막한 담장을 넘어 바다로 굴러가기 일쑤였다. 멸치가 잡히는 철, 아이들의 놀이터인 바닷가 공터는 멸치 말리는 장소로 변했다. 해변을 따라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은 비릿한 멸치 냄새가 따라다녔다. 멸치는 햇살을 받으며 단단해졌다. 오며 가며 허리 숙여 몇 개씩 집어 먹는 섬 아이들의 간식이 되기도 했다. 마른 멸치보다 온기가 남아 있는 촉촉한 멸치가 더 맛있었다. 어떤 시인은 “멸치는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고 했다. 작고 비리고 시시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뿌려서 말렸고, 아무렇게나 한 움큼씩 주워 먹었다.

세월이 흘러 멸치가 많이 잡히는 섬으로 조사를 갔다. 멸치잡이 어선을 타고 싶었다. 산더미처럼 잡히는 멸치를 확인하려면 권현망 어선을 타야 했다. 멸치잡이 어선 중 가장 큰 규모의 선단이다.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다니며 질문을 쏟아내는 외지인을 선뜻 태워줄 리 없다. 너무도 타고 싶고, 반드시 타야만 했으나 태워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느 봄날, 선창가를 서성이던 나에게 선주가 한번 타 보겠냐고 했다.

어군탐지선의 지휘를 받은 두 척의 대형 어선이 양쪽으로 벌리며 그물을 내렸다. 700m의 그물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어군탐지기는 바닷속의 물고기 떼를 훤히 들여다본다. 살기 위해 빠르게 움직여도 동력선의 속도에 금방 따라잡힌다. 수백 미터의 그물은 장벽이 되어 멸치 떼 앞을 가로막는다. 최신 장비로 무장한 어선 앞에서 멸치 무리는 갈 곳이 없다. 대량으로 잡힌 멸치는 파이프를 통해서 멸치 운반선으로 끌어올려졌다. 파닥거리던 멸치는 끓는 소금물에 담겼다. 뿌연 김을 뿜어내며 멸치 상자는 쌓여 갔다. 2척의 운반선이 번갈아 가며 멸치를 육지로 운송했다. 잡은 멸치는 건조 상자로 5000개가 넘었다. 포식자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유리한 멸치의 무리 짓기는 최첨단 장비 앞에서는 싹쓸이당하는 무리 짓기일 뿐이었다.

어획량의 1, 2위를 다투던 동해의 명태와 서해의 조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듯, 멸치가 우리의 바다에서 사라지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자산어보’에 멸치에 관한 기록이 있다. 국이나 젓갈을 담고, 말려서 각종 양념으로도 사용하며 선물용으로는 천한 물고기라 했다. 과거에는 보잘것없는 물고기로 인식되던 멸치. 지금은 건멸치, 젓갈, 액젓, 멸치육수, 분말 등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물고기가 멸치다.

멸치는 생장 주기가 짧고, 산란을 많이 하는 점을 들어 명태나 조기와는 다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럴까? 전통 어법인 돌담을 쌓아 가두는 돌살이나 해안가에서 그물을 당겨서 잡는 후리어법 등으로 멸치를 잡기 어렵게 됐다. 20세기 초 일본인 멸치어업의 근거지인 진해만과 거제도 해안에서 200척의 멸치 어선이 밤낮으로 멸치를 남획했다. 결국 진해만 어장은 멸치가 고갈되었다. 물고기를 잡으려는 사람과 이를 피하려는 물고기 간의 숨바꼭질 역사는 점점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어족자원이 고갈될 때마다 새로운 어장으로 옮겨 가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옮겨 갈 곳이 없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멸치#섬#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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