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 수능 보는데, 뭐 줄 거 없냐”…경조사가 된 수능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3일 16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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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박모 씨(30)는 최근 직속상사에게서 ‘우리 딸이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상사는 농담조로 ‘뭐 줄 거 없냐’는 말도 건넸다. 하지만 상사의 평가를 받는 박 씨로서는 상사의 말을 흘려듣기 쉽지 않았다. 박 씨는 서로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성의를 전달할 만한 ‘센스 있는’ 선물을 고르기 위해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결국 지인의 조언에 따라 박 씨는 이달 초 백화점에서 고급 화장품 브랜드의 립스틱을 사서 상사의 딸에게 선물했다.

15일 치러지는 2019학년도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 온 가운데 ‘수능 선물 부담’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직장 동료, 친지 자녀의 수능이 일종의 경조사처럼 여겨지면서 격려의 의미가 담긴 선물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경기도내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오모 씨(33·여)는 올 수능에만 4명의 수험생을 챙겨야 한다. 오 씨의 시댁과 친정에 수험생이 한 명씩 있고, 직장상사 두 명의 자녀도 나란히 수능을 치르는데 누구는 챙기고 누구는 안 챙길 수 없어 네 명을 모두 챙기기로 했다. 성의를 보이기 위해 오 씨가 생각한 선물은 한 사람당 3만~5만 원선. 네 명을 합치면 12만~20만 원을 쓰게 된 셈이다. 오 씨는 “지난해에도 주위에 수험생이 있어 챙겼는데 올해는 넷이나 되니 지출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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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인사치레로 주고받는 선물에 응원을 받아야 할 수험생이 도리어 불편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올해 수능을 치르는 고3 김모 양(18)은 부모님 지인과 친척을 비롯한 7명의 어른들에게서 격려 선물을 받았다. 용돈, 초콜릿뿐 아니라 홍삼, 한약 등 고가의 선물도 있었다. 김 양은 “공부를 충분히 하지 못했는데 잘 모르는 어른들에게서도 선물을 받으니 압박을 느낀다”며 “재수를 하게 되거나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면 괜히 그분들께 죄송하고 민망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고3 황모 양(18)은 “수능 선물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관례적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며 “정작 수험생들은 집에 쌓인 초콜릿과 떡이 물려서 잘 안 먹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수능이 일종의 경조사가 된 것은 대학 진학이 개인은 물론 한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수험생 가족의 지인들도 ‘국민 행사’인 수능을 모른 척 지나치기 쉽지 않다.

수능 시즌에 각 기업이 선물용 제품을 쏟아내면서 선물을 주고받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측면도 있다. 박은아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는 “체면과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와 기업의 이윤추구가 결합돼 수능 선물에 대한 부담이 점점 커지는 것”이라며 “물질적·형식적 응원에서 탈피해 전화나 문자메시지로 마음을 전달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지 기자 eun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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