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의 오늘과 내일]송민순 회고록,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봤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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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정치부장
정용관 정치부장
꼭 5개월 전인 지난해 11월 24일,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 파문의 주인공인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과 오찬을 함께 한 적이 있다. 당시 필자는 송 전 장관에게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한 상태였다. 송 전 장관은 “정치 이슈화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취지로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뤄졌다. 메모를 토대로 대화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면 회고록 논란이 터졌을 때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처럼 대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 지도자는 상황이 주어지면 돌파를 해야 하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상황을 피한 것 아니냐. ‘2007년 당시 상황에선 기권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고, 북한과도 깊은 대화가 오갈 수 있는 여건이었다.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 당신들은 북한과 물밑 대화를 할 채널도 없지 않느냐’라고 정정당당하게 말했어야지. 어떻게 중대한 기억의 착오라고 할 수 있나.”

노 전 대통령이라면 다르게 대응했을 것이다? 사실 송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의 ‘외교 황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 외교부 차관보로 북핵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낸 그는 이듬해 장관급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으로, 또 유엔 사무총장으로 가게 된 반기문 전 장관(외시 3회)의 후임으로 숱한 선배들을 제치고 여섯 기수나 건너뛰어 장관에 발탁됐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이들에 따르면 보통 외교관과 달리 ‘배짱(guts)’이 있던 송 전 장관을 노 전 대통령은 각별히 아꼈다. 이런 기류를 잘 알던 당시 청와대 386 참모들 일각에선 “송 전 장관은 외교관으로 공직을 마감하기는 아까운 인물”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송 전 장관은 노무현 정부 임기 말 서서히 외교안보 라인의 파워게임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교섭 단계에서부터 철저히 배제됐고, 당시 이재정 통일부 장관과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등으로 무게추가 옮겨간 것이다. 정상회담 동행을 주장했다가 이 전 장관으로부터 “한미 정상회담 할 때 통일부 장관도 가냐”는 면박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노 전 대통령의 인정을 받으며 외교 수장까지 지낸 송 전 장관이 노무현 정부를 계승하겠다는 문 후보와 민감한 대선 국면에서 각을 세우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아이러니다. 문 후보가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을 앞두고 북쪽에 의견을 물어보라고 했는지, 우리 정부의 기권 방침을 통보했는지, 그저 동향을 파악했는지 등을 둘러싼 진실게임은 논외로 치자. 송 전 장관도 자신의 관점에서 본 회고록이니 100% 완벽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송 전 장관이 문 후보 측의 해명이 회고록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며 “‘꽃과 나무가 서 있다’, 이걸 여기 ‘화목이 서 있다’고 말한 것과 똑같다”고 표현한 게 오히려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

다만 유력 대선 주자인 문 후보와 참모들이 한솥밥을 먹던 퇴직 외교관을 상대로 “비열한 새로운 색깔론, 북풍 공작이다” “반 전 총장 대통령 만들기 활동을 했었다. 국민의당에 가 있는 손학규 전 대표와 굉장히 가까운 관계다” 운운하며 ‘정치적 의도’를 제기하고 검찰 고발 조치까지 한 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송 전 장관은 사석에서 반 전 총장에 대해 “재단을 만들어서 국제 분쟁 조정 같은 명예로운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가는 루트가 있듯이 유엔 사무총장이 되는 건 닦여진 길이 있다. 하지만 대선은 다르다”고 했었다. 손 전 대표와 가까운 건 맞지만 회고록 파문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에겐 오히려 불리한 이슈로 자리하고 있다. 문 후보가 이런 반응을 내놨다면 어땠을까. “회고록 다 읽어봤는데, 기억에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데 시사점이 많았다. 집권하면 잘 참고하겠다.”

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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