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정 교수 “선사시대 돼지, 식용 아닌 제례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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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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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동물사육’ 논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화가 김두량(1696∼1763)의 ‘흑구도’(위)와 5∼6세기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파편. 
토기에 장식된 토우는 멧돼지 사냥에 나선 경주개 ‘동경이’(천연기념물 540호)를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반도에서 개는 신석기
 초기부터 사육됐을 정도로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다. 동아일보DB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화가 김두량(1696∼1763)의 ‘흑구도’(위)와 5∼6세기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파편. 토기에 장식된 토우는 멧돼지 사냥에 나선 경주개 ‘동경이’(천연기념물 540호)를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반도에서 개는 신석기 초기부터 사육됐을 정도로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다. 동아일보DB
한반도에서 처음 인간이 돼지를 기른 이유는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고고학에서 가축 사육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목 내지 농사와 함께 인류의 삶이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가축 사육은 농경과 함께 이뤄졌을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 작물을 재배하듯 동물을 길러 식용으로 쓰거나 농업의 보조 또는 대안으로 사육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한반도 가축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한국고고학회가 펴낸 ‘농업의 고고학’(사회평론)에 실린 이준정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48)의 논문 ‘한반도 선사·고대 동물 사육의 역사와 그 의미’는 조금 색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간 동물고고학에 천착해온 이 교수는 한반도의 가축 사육이 기존 학계의 시각과는 달리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고 봤다. 이 땅에서 발견된 동물 무덤이나 출토 뼈를 살펴본 결과, 우리 조상들이 처음 가축을 기른 것은 생계나 경제적 요인보다 제례적인 목적이 더 컸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한반도는 물론 세계 역사에서 가장 먼저 가축화한 동물인 개는 특히 이런 상황을 잘 대변한다. 보편적으로 인류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개를 기른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한반도도 2008년 인천 옹진군 연평도의 까치산 패총에서 찾은 개 유존체(遺存體·동물 유골의 잔해)를 탄소연대 측정한 결과, 신석기 전기인 기원전 4460∼기원전 4310년경부터 개를 기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까치산 패총은 도살된 흔적이 없는 ‘의도적 매장’이어서 더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개 관련 유적 60여 곳을 살펴보면, 잡아먹은 뒤 폐기물로 처리한 사례는 9곳 정도밖에 안 된다. 또 대부분 철기나 삼국시대의 유적이다. 반면 신석기나 청동기시대에 발견되는 유적은 개 무덤이거나 사람 묘에 함께 순장한 것이 다수다. 이 교수는 “한반도 신석기 인류는 개를 애완이나 경비, 사냥 보조용으로 쓰며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만 놓고 보면 한국의 보신탕 문화에 반감을 가진 서구지역에서 오히려 식용 흔적이 더 많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개보다는 다소 늦지만 돼지도 한반도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정착한 가축이다. 중국에서 신석기 사육종 돼지 유존체가 다량 출토돼 한반도도 비슷한 시기에 유입됐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돼지 유적 17곳은 모두 초기 철기시대 이후의 것들이다.

돼지 하면 식용부터 떠오르지만, 돼지 역시 한반도에서는 다른 목적이 더 컸다. 대표적인 사례인 강원 춘천시 천전리·율문리 유적을 보면 해외에서는 보기 드문 양상이 뚜렷이 드러난다. 별개로 만들어진 유구에 배치된 토기 안에서 돼지 두개골만 들어 있는 유적이 나왔다. 충남 아산시 갈매리 유적에선 생후 1∼2년 된 비교적 어린 돼지 유존체 10개가 함께 출토됐는데 역시 머리 부위를 따로 모아뒀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지금도 익숙한 우리네 고사(告祀)를 떠올려보면 금방 답을 알 수 있다. 돼지 머리로만 따로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이 교수는 “그 시절 부족 혹은 마을의 돼지를 이용한 제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며 “머리는 조상이나 신께 바치고 나머지는 부족민이 모여 ‘공식(共食·communal eating)’을 하며 결속을 강화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당시 한반도에서 동물성 영양분은 주로 어디서 공급받았을까. 사실 산지가 발달하고 자연초지가 드문 한반도에서 가축의 대량 사육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교수는 농업 경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철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먹거리’를 위한 가축 사육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인간이 농사를 지어 먹고 남은 잉여생산물로 가축 사육에 필요한 사료를 충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가축 사육 초창기엔 야생동물을 사냥해 식량원으로 활용하는 게 사육에 드는 비용과 노력보다 훨씬 수월했다”며 “가축 사육은 제사나 애완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해 소규모로 이뤄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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