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스포츠] 이치로와 1995년 한일슈퍼게임의 추억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4월 18일 1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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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스즈키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치로와 아버지가 만든 어릴 적 루틴에 이은 비화 2편
1995년 이종범vs이치로, 한일 두 영웅의 맞대결 기억
좁은 수족관에 잡아두기에는 너무 컸던 물고기 이치로
오기 아키라와의 그 저녁 회식에서 결정된 빅리그행
이치로가 잊지 못하는 은인 3명…오기, 아라이, 미와타

1994년 마침내 오릭스의 주전 1번타자로 고정된 이치로는 일본프로야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기 아키라 감독이 기회를 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놀라운 타격기술을 보여줬다. 시계추타법은 경이로웠다. 상상도 못할 타격으로 안타를 만들어냈다. 새로 단장한 고베 그린스타디움에서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한 시즌 200안타를 돌파했다. 130경기에서 쳐낸 안타는 무려 210개. 경기당 1.62개꼴이었다. 타율은 0.385, 퍼시픽리그 역대 최고타율이었다. 13홈런, 54타점, 111득점, 29도루를 기록한 이치로는 당연히 퍼시픽리그 최우수선수(MVP)였다.

1995시즌 이치로는 팀을 12년 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179안타, 타율 0.342, 25홈런, 80타점, 104득점, 49도루를 기록했다. 2시즌 연속 MVP였다. 고베는 그해 대지진으로 큰 슬픔을 겪었기에 우승의 가치는 더욱 컸다. 이치로는 이재민을 위해 아무도 몰래 성금을 냈다.

●천재 1번타자의 대결-이치로vs이종범, 1995년 한일슈퍼게임의 기억

전국구 스타가 된 이치로는 1995년 11월 벌어진 한일슈퍼게임에 출전했다. 마침 한국에선 해태 이종범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4할 타율과 시즌 200안타에 도전했던 시즌이다. 이치로와 이종범의 맞대결은 큰 관심사였다. 11월 3일 도쿄돔에서 펼쳐진 제2회 한일슈퍼게임 1차전 때 두 나라 취재진의 요청으로 이종범과 이치로는 악수를 나눴다.

도쿄돔과 요코하마구장에서 벌어진 1·2차전에서 이치로는 부진했다. 1차전은 4타수 무안타. 선발 이상훈(LG)과 구대성(한화)에게 내야땅볼 2번과 외야플라이 2번으로 물러났다. 2차전에서도 선발 조계현(해태)에게 우익수플라이와 4구를 기록한 뒤 5회 교체됐다.

이치로는 경기에 빠졌지만 팬 서비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를 보려고 모두가 외야석을 찾는 바람에 가장 먼저 외야석이 팔린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여성 팬들은 이치로가 보일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이치로는 교체된 뒤에도 이닝 사이사이 외야수와 캐치볼을 하며 팬들에게 얼굴을 보여줬다. 아이돌 가수 부럽지 않은 인기였다. 캐치볼 뒤에는 꼭 공을 팬들에게 던져줬다.

이종범은 2차전 1회 일본 선발투수의 공에 머리를 맞았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 2루 도루를 성공시키는 근성을 보여줬다. 5-2로 한국이 승리한 2차전에서 일본대표팀을 지휘했던 요코하마의 곤도 히로시 감독은 “우리가 실력에서 졌다. 이종범의 정신력이 대단한다”고 칭찬했다.

이치로가 빠진 고시엔구장의 3차전에서도 한국이 3-2로 이기자 일본 언론은 “일본 선수들이 무성의하게 경기한다”며 질타했다. 일본프로야구기구(NPB) 가와시마 회장도 “이런 식으로 우리가 전패하면 한국의 KBO 총재 등 수뇌진에게 사과할 것”이라며 이례적으로 일본 선수들을 압박했다.

미국에서 마무리캠프를 하던 다이에의 오 사다하루 감독이 귀국해 지휘봉을 쥔 4차전에서 일본은 총력전을 펼쳤다. 한국 타선을 1안타로 묶고 4-0으로 이겼다.

5차전에 이치로가 다시 등장했다. 고향 근처 나가라가와구장에서 열린 경기였다. 1·2차전에서 부진했던 이치로는 자존심이 상했던지 2차전 뒤 오릭스의 마무리캠프가 한창이던 일본 최남단의 섬 미야코지마로 날아갔다. 그 곳에서 집중적으로 훈련한 뒤 선발 4번타자로 출전했다.

그날 이치로의 진가는 수비에서 드러났다. 5회 2사 1·2루서 홍현우(해태)의 안타 때 2루주자 장종훈(한화)이 홈으로 뛰어들었다. 라이트의 이치로는 빨랫줄 송구로 장종훈을 쉽게 잡았다. 너무나 우아했던 송구여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의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있다. 경기 MVP는 이치로였다.

대회를 주관했던 일본 주니치스포츠는 5차전 뒤 이종범과 이치로를 비교하는 아름다운 기사를 썼다. 이종범의 힘과 스피드, 이치로의 부드러움과 기술을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특성에 비유한 글이었다. 결국 이치로는 한일슈퍼게임 4경기에서 타율 0.385(13타수 5안타), 1타점, 2도루, 2득점을 기록했다.
스즈키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스즈키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일본프로야구라는 수족관에 갇혀있던 큰 물고기 이치로

1996시즌 이치로는 193안타, 타율 0.356으로 3시즌 연속 리그 MVP가 됐다. 오릭스는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 3번타자로 자리를 옮긴 1997시즌에는 185안타, 타율 0.345를 기록했다. 이후 0.358~0.343~0.387의 시즌 타율을 기록했다. 7시즌 연속 리그 타격왕에 오른 이치로를 능가할 타자는 없었다. 7시즌 동안 통산 1242안타를 때렸고, 타율은 무려 0.353이었다.

1997시즌에는 2개월 동안 216타석에서 단 한 차례도 삼진을 당하지 않았다. 1999시즌에는 그가 때린 스트라이크 가운데 70%가 안타였다. 2000시즌에는 상대 투수가 던진 원바운드 공을 안타로 만드는 진기명기도 보여줬다. 한마디로 일본 투수들을 가지고 놀았다. 당시 지바롯데를 지휘하던 보비 발렌타인 감독은 이런 이치로를 보고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잘하는 야구선수 5명 가운데 한 명”이라고 극찬했다.

1996년 미국의 올스타들이 일본을 찾은 미일슈퍼시리즈. 이치로는 메이저리그 투수들을 상대로도 압도적 기량을 보여줬다. 미국 멤버는 배리 본즈, 칼 립켄 주니어, 페드로 마르티네스 등이었다. 본즈는 이치로의 타격을 보더니 “저 조그만 자식 정말 잘 친다”고 감탄했다. 이치로의 플레이를 지켜본 LA 다저스 토미 라소다 감독은 피터 오말리 구단주에게 “빨리 영입하자. 이치로에게 일본야구는 수족관이다. 빨리 더 넓은 바다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치로도 메이저리그에서 자신의 경쟁력을 확인하고 싶었던지 1999시즌부터 일본에서 활동하는 외국인선수들에게 많은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조용히 미국행을 준비했다. 미국 육상스타 칼 루이스가 했던 달리기 방식을 발전시키고, 근육을 늘리고, 타격자세도 조금씩 수정했다.

이치로는 미일슈퍼시리즈를 통해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기량이 통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미 일본프로야구에선 그를 누를 투수가 없었다. 기록도 쌓을 만큼 쌓았다. 이제는 더 큰 무대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도 차츰 늘었다.

이치로는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오기 감독과의 의리 때문이었다. 먼저 팀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오기 감독은 2000년 가을 이치로와 약혼자 유미코를 아무도 몰래 고베의 고급 중식당으로 불렀다.

오기 감독은 이치로에게 속내를 물었다. 이치로는 “메이저리그에 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오기 감독의 대답은 남자다웠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더 잡아두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더 큰 무대에서 실력을 겨뤄보라”며 흔쾌히 보내줬다. 이치로의 빅리그행은 그렇게 성사됐다.

스즈키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스즈키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치로가 잊지 못하는 3명의 은인…오기, 아라이, 미와타

이런저런 인연으로 오기 감독은 이치로의 영원한 은인이다. 오기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또 한 명의 은인이 있다. 바로 타격코치 아라이 히로마사다. 재일동포 3세다. 한국이름은 박종율. 1983년 갓 태어난 한국프로야구가 리그의 수준을 올리기 위해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하던 한국계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명단을 작성했을 때 들어있던 이름이다.

아라이는 일본의 야구명문 PL학원 소속으로 팀을 고시엔대회 결승까지 이끈 교타자였다. 운동선수로는 체격이 작아(키 174㎝) 프로팀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호세이대학에 진학했다. 미일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빼어난 타격기술을 보여주자 난카이의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스카우트를 결정했다.

그는 초창기 한국프로야구가 데려오기에는 너무도 야구를 잘하는 선수였다. 아라이는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1987년 긴데쓰 소속으로 퍼시픽리그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통산 2000안타를 돌파해 명구회 가입 조건을 채운 뒤 1992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방송해설가로 활약하다 1994년 긴데쓰 시절의 은사 오기 아키라 감독의 부름을 받아 오릭스 타격코치가 됐다. 여기서 만난 선수가 이치로다. 1991년 투수로 입단한 이치로의 독특한 시계추타법을 완성시키고 응원해줬을 뿐 아니라 선수 등록명을 스즈키에서 ‘이치로’로 바꿔준 사람이다.

이치로는 이런 은혜를 잊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일본 언론과의 접촉을 꺼려할 때도 유일하게 아라이와의 대담에는 응하며 의리를 지켰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발행되는 스포츠전문지(데일리스포츠)였는데, 2002년 당시 일본 특파원으로 있던 기자는 두 사람의 대담이 나온 특집기사를 보고 배경이 궁금해서 여기저기 취재했던 기억이 난다.

이치로는 또 한 명의 은인도 잊지 않는다. 그를 프로에 데려온 스카우트 미와타 가쓰토시다. 당초 고향팀 주니치나 다이에에 입단하고 싶다는 꿈을 꿨던 이치로의 숨은 능력을 제대로 본 사람으로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일본프로야구 사건사고 역사에 등장한다. 1998년 팀이 지명한 고졸 유망주 투수 아라가키 나기사가 뜻밖에 입단을 거부하자 투신자살을 택해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다. 그만큼 책임감이 강했던 스카우트였다. 이치로는 지금도 해마다 스카우트의 무덤에는 잊지 않고 찾아간다.

#아라가키 나기사에 얽힌 여담

오릭스의 입단 제의를 거부했던 아라가키는 결국 원했던 대로 다이에에 입단했다. 아라가키는 2004년 지바롯데 이승엽에게 일본프로야구 진출 1호 홈런을 맞아 우리에게 더 유명해졌다. 4월 4일 경기 4회에 마린스구장을 벗어난 장외 역전 2점홈런은 비거리가 무려 150m로 주차장에 세워져있던 승용차의 후면유리를 박살내 더 화제가 됐다. 이날 이승엽은 2개의 홈런을 쳐내며 일본프로야구에서의 성공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1년의 기다림이 더 필요했다.<계속>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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