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재경]장발장과 지장보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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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모든 중생 구원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
염라대왕 앞에서 재판받을 때 亡者를 위한 변호사 역할을 한다
벌금 없어 구속위기 서민에게 벌금 낼 돈 꿔주는 장발장은행
은행장이나 기부자들에 일 닥치면 지장보살이 확실히 변론해줄 것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겨울 한파가 매섭다.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했지만 경기 침체로 사랑의 온도가 낮다고 걱정한다.

은행은 돈을 빌려준 뒤 이자를 받아 돈을 버는 금융기관이다. 그런데 이상한 은행이 있다. 스스로 ‘돈 없는 은행’을 표방하고, 대출금에 이자도 받지 않는다. 6개월 후 1년간 원금을 나눠 갚으면 된다. 대출 자격은 제한이 있다. 죄를 지어 벌을 받았는데 벌금을 내기 어려운 소위 ‘장발장’만 빌릴 수 있는 ‘장발장은행’이다. 죄를 짓고 벌금형을 받았는데 돈이 없어 벌금을 내지 못하면 최장 3년간 교도소에서 노역을 해야 한다. 벌금 미납으로 수감된 사람은 2015년 한 해 4만7855명이었다.

장발장은행은 2015년 2월 25일 출범 이후 지금까지 5021명의 개인, 단체, 교회에서 7억7000만 원의 성금을 모았고, 538명에게 10억여 원을 빌려주었다. 대출은 신용 조회 없이 무담보, 무이자로 진행되는데 270명이 대출금을 상환하고 있고, 82명은 전부 갚았다.

다른 은행과 달리 장발장은행은 고객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병행해 왔다. 그 결실로 내년 1월 7일부터 벌금형에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도록 개정 형법이 시행된다. 징역형에는 집행유예가 인정되는데 그보다 가벼운 벌금형에는 인정되지 않아서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돈 때문에 구속되는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벌금형 집행유예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고 2016년 1월 6일 형법이 개정됐다. 2년의 정비 기간을 거쳐 2018년 1월 7일 시행되는 것이다. 장발장은행의 고객은 크게 줄겠지만 서민 인권 차원에서 큰 진보다.

‘장발장’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이다.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추방돼 19년간 망명생활을 했던 프랑스의 문호 위고는 ‘폭군의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1000명, 100명, 10명, 1명으로 줄어들 때 내가 거기에 남는 마지막 한 명이 될 것’이라는 시를 썼다고 한다.

비슷한 각오를 표명한 부처님이 있다. ‘지장보살’이다. 본래 인도 바라문의 딸이었는데 어머니가 온갖 악업을 짓다가 죽자 지옥에 내려가 고행을 했고 결국 무간지옥에서 어머니를 구했다고 한다. 그녀는 지옥의 참상을 연민한 나머지 ‘지옥에서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이 구원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地獄未濟 誓不成佛)’는 서원을 했다는 것이다. ‘땅속에 감추었다’는 뜻의 지장(地藏)은 어머니를 찾아 지옥으로 떠난 18세 소녀가 고통받는 타인에게 가진 것을 모두 보시하고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준 뒤 구덩이 속에 숨었다는 뜻이라 한다.

20일에 한국판 판타지 블록버스터 ‘신과 함께―죄와 벌’이 개봉한다. 주호민 작가의 동명 인기 웹툰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스포일러를 피해 한마디로 요약하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차사가 영혼을 데리고 저승으로 간다. 사후 7일마다 염라대왕 등 소위 명부시왕(冥府十王)에 의해 7번의 재판을 받는데, 그 과정에서 생전의 잘잘못이 낱낱이 드러나고 지옥부터 극락까지 영원한 심판이 있게 된다. 이 7·7일의 재판 과정에서 망자의 영혼을 잘 봐달라고 유족들이 바치는 정성이 이른바 ‘49재’다. 이때 망자의 영혼을 지키고 변론해서 좋은 판결을 받게 도와주는 변호사가 지장보살이다.

수년 전 선친이 작고하셨을 때 마을 뒷산에 있는 작고 예쁜 절 선운사에서 49재를 모셨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선운사 대웅전의 세 분 부처님께 인사를 드린다. 가장 신경 쓰고 공을 들이는 분은 가운데의 석가모니불보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지장보살이다. 자식 입장에서는 부처님 위격과 무관하게 지장보살에게 더욱 간절한 마음이 든다.

심판하는 염라대왕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에게 중벌을 내리려고 할 때마다 와서 따지고 호소하는 지장보살(변호사)이 얼마나 귀찮고 피곤하겠는가? 하지만 무시무시한 지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에게는 찬란한 빛이자 구세주일 것이다. 서양 속담에 ‘변호사는 모두 지옥에 있다’고 한다.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지장보살을 도와서 지옥을 비우기 위해 내려간 것이겠지!

장발장은행장 이하 관계자들이 죽으면 아마도 지장보살 본인이 변호사나 저승차사가 되어 무적의 철갑선을 탄 채 마중 나올 것이다. 그 재판 결과는 보나마나다. 초강력 변호사의 전관예우로 무사통과 아니겠는가? 연말이다. 시민들의 기부로 사랑의 수은주가 치솟고 장발장은행의 대출 재원도 넉넉해지면 좋겠다.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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