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주애진]‘저녁’은 사치가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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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애진 경제부 기자
주애진 경제부 기자
“하루에 22시간씩 일했어요. 새벽 4시 반에 퇴근하고 아침 6시까지 다시 출근했죠.”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20대 여성의 이야기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일반 국민의 의견을 법안으로 발의하자는 내용의 이날 방송에서 그는 일명 ‘칼퇴근법’을 제안했다. 정보기술(IT) 회사에서 일했던 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을 하면서 결혼도 아이도 생각해볼 수 없었다”고 했다. IT업계의 관행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회사원이 공감했다.

얼마 전 만난 공무원시험 수험생 조모 씨(27·여)도 비슷했다. 그는 제약회사의 홍보 기획을 맡은 에이전시에서 1년간 일했다. 박봉인 데다 오전 2, 3시에 퇴근하는 생활이 계속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저녁에 운동하길 좋아했는데 그걸 포기하니 아침에 눈뜨기조차 싫을 만큼 불행하다고 느껴졌다. 결국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올해 초 공무원시험 준비에 나섰다. 조 씨는 “회사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지금 공부하는 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저녁이 있는 삶.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손학규 당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내건 슬로건이다. 당연한 말 같기도 한 구호에 눈물이 핑 돌았다는 회사원이 많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노동시간이 줄어들지 않은 건 물론이고 사회 전반적인 인식도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저녁이 ‘없는’ 삶을 더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취업 포털 ‘사람인’이 지난해 7월 회사원 169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1.2%가 야근을 했다. 횟수는 일주일에 평균 네 번, 시간은 평균 3시간 이상이었다.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 신조어도 쏟아졌다. 회사에서 기르는 가축처럼 일하다는 의미의 ‘사축’,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프로 야근러’, 휴식을 포기한 채 일에만 얽매인 ‘쉼포족’ 등등. 서울의 야경이 아름다운 건 자정이 넘도록 퇴근하지 못한 회사원들 덕분이라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다.

반면 청년들의 기대치는 노동 현실과 큰 차이를 보였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올해 3월 신입 구직자 106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직장 선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근무시간 보장(24.8%)이었다. 그 뒤를 복리후생(20.7%), 성장 가능성(18.3%), 연봉(16.6%) 순으로 이었다. 응답자의 39.2%는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세계 행복지수 1위인 덴마크 사람들의 비결은 일과 삶의 균형 있는 배분이라는 게 ‘휘게 라이프’의 저자 메이크 비킹의 분석이다. 덴마크어인 ‘휘게(Hygge)’는 웰빙을 뜻하는 노르웨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소박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정도의 의미다. 양초나 벽난로, 담요 등의 물건이 주는 느낌을 떠올리면 된다. 휘게 라이프는 올해의 트렌드로 꼽힌다. 그만큼 일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편안함을 얻는 것에,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일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다음 달 9일 치러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는 앞다투어 근로시간 단축을 공약으로 내놨다. 돌발노동 금지, 최소 휴식시간 보장 등 얼핏 당연해 보이는 일들도 포함됐다. 평범하고 당연한 삶이 사치가 돼버린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대통령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결코 아니다. 사회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5년 뒤 과연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이란 대선 공약을 다시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주애진 경제부 기자 jaj@donga.com
#저녁이 있는 삶#세계 행복지수 1위 덴마크#근로시간 단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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