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해]이재만 집사의 낡은 ‘박근혜 수첩’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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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해 논설위원
최영해 논설위원
이재만 대통령총무비서관이 박근혜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 직후였다. 이재만은 공약과 정책을, 정호성은 정무와 메시지 기획, 안봉근은 수행과 경호를 맡았다. 이재만이 4급 선임보좌관으로 맏형이었지만 이 3인방을 뽑은 사람은 정윤회 ‘비서실장’이었다. 정윤회 씨는 국회에 보좌관으로 등록하지 않아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여의도 의원회관에선 그렇게 불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광재 안희정 등 386 참모들과 격의 없이 토론하고 어울린 반면 박근혜 의원은 참모들에게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전문가를 소개하고 박 의원이 찾는 사람에게 전화를 돌리는 일은 이재만의 몫이었다. 한양대 경영학과 85학번. 박정희 대통령 때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내다가 3선 개헌 반대로 박정희와 척을 진 예춘호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의 아들 예종석 한양대 교수(경영학)가 지도교수다. ‘사회연계망이 혁신 수용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논문을 써 석·박사과정 10년 공부 끝에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수가 되고 싶어 했던 그가 박근혜를 만나 정치에 발을 담근 것은 운명일지 모르겠다.

청와대 자금 출납을 맡은 총무비서관이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주관하는 인사위원회 고정 멤버에 들어가는 것은 이전 정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인사수석 민정수석 정무수석 국정기획수석 등 수석급 청와대 실세들이 모이는 인사위원회에 이재만은 대통령의 복심(腹心)처럼 꼭 참석한다. 노무현 대통령 때 정무수석을 지낸 유인태 의원은 “문고리 권력에게 인사권까지 주는 것이 정상은 아니다”며 “과거 정부에서도 총무비서관에 대통령의 심복을 썼지만 실제 힘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의중을 빠삭하게 꿰뚫고 있는 명실상부한 ‘집사 이재만’의 힘은 16년 동안 움켜쥐고 있는 낡은 ‘박근혜 수첩’에서 나온다. 박지원 의원이 만들어낸 ‘만만회’(박지만 이재만 정윤회)라는 조어(造語)는 진실과 상관없이 박근혜 청와대의 파워엘리트를 일컫는 말로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는 청와대 안살림에 장차관, 공기업 기관장 인사까지 훈수 두는 왕비서관이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총무비서관을 지낸 최도술도 인사에는 언감생심이었지만 청와대 근무 6개월 만에 뇌물 사고가 터졌다. 관가에서는 부처 국장급 인사, 심지어 심의관 인사까지도 청와대만 가면 오리무중이 되는 것이 문고리 권력 때문이라는 불평이 나온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국감에서 “위에서 결재가 안 나…”라며 윗선을 청와대라고 콕 집은 것을 보면 이 정부의 인사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만이 결재 서류를 꽉 쥐고 있는지, 대통령이 관저에 쌓아놓고 번번이 장고(長考)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욕은 이재만이 먹고 있는 형국이다.

노무현 청와대로 치면 이재만은 마치 최도술에 이광재 국정상황실장까지 합쳐놓은 인물 같다.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리는 칩거와 은둔 스타일은 박 대통령과도 빼닮았다. 전북 전주의 한 교회 장로가 ‘이재만이 보낸 사람’을 사칭하며 대우건설에 이어 KT 회장까지 속이려다 들통 났다. 이재만 권력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엿보인다. 김영삼 대통령의 집사 장학로, 노무현의 최도술과 양길승, 이명박의 김희중과 박영준의 실패는 그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그의 스승 예종석 교수는 “답답할 정도로 원칙주의자인 이재만 군에게 대통령비서는 절대 앞에 나서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말했다. 과거 투명하지 못한 권력의 운용은 정권에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권력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이 탐하는 ‘박근혜의 낡은 수첩’이 어느 순간 이재만을 겨누는 칼날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스승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
#이재만 집사#박근혜#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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