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의 뉴스룸]임신은 ‘벼슬’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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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아들 둘, 딸 하나 세 아이의 아빠다. 의도한 건 아니다. 몇 년을 망설이다 여덟 살 터울로 낳은 아이들이 쌍둥이다. 올해 세는나이로 네 살이 됐다. 주변에선 “다둥이 아빠 힘내라”고 한마디씩 거든다. “애국자시네요, 다복하시네요….”

마냥 웃진 못한다. 애국지사들이 왜 패가망신했는지 이제 알겠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던 옛 가족계획 표어는 사실이었다. ‘아빠 힘내세요’란 동요는 부담이다. “아빠가 힘든 건 사실 너희 때문이야….” 쌔근쌔근 잠든 아이들은 천사다. 아이가 예쁜 게 아니라 잠들어줘서 예쁘다.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를 갈구한다. 네가 편하면 내가 힘든 ‘제로섬 게임’이니까. 넋두리를 하자면 밤을 새워도 끝이 없다.



누가 낳으라고 했나, 임신·출산이 무슨 벼슬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아니, 이제 임신하면 벼슬이라도 줘야 할 판이다. 그만큼 ‘출산 파업’이 심각하다. 불안한 미래에 당장 내 앞도 캄캄한데 막중한 책임감과 희생까지 떠안을 자신이 없다.

아이를 낳아 달라, 낳아만 주면 뭐든 해주겠다고 읍소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정부 대책은 여전히 고자세다. 출산은 당연한 것, 시혜적으로 지원해주면 더 낳겠지 생각한다. 가임기 여성을 ‘출산 기계’로 보고 지역별 숫자를 집계한 ‘대한민국 출산지도’ 같은 어이없는 발상이 여기서 나온다. 대책 내놓으라고 채근하면 부처별로 이것저것 되는 대로 긁어모은다. 별 관계없는 정책도 ‘저출산’ 딱지를 붙여 예산을 따낸다. 정부는 이걸 모아 ‘종합대책’이라고 내놓는다.

이런저런 지원은 차고 넘치지만 정작 도움이 되는 건 적다. ‘정부가 화끈하게 쏜다’고 해서 찾아보면 소득 기준에 걸려 해당 사항이 없다. 다자녀는 전기요금 30%를 깎아준다. 상한선은 월 1만5000원. 서울시는 하수도요금도 감면했다. 월 2000원꼴. 어려운 분들껜 죄송하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렇게 쓴 돈이 10년간 100조 원이다. 차라리 눈에 띄지도 않는 지원금을 모아 특별 재원으로 활용하는 편이 낫다.

차기 정부에선 백화점식 저출산 대책을 엄격히 평가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 20일 열린 한국여성경제학회 여성경제정책포럼에서 성호용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여성을 위한 시혜적 출산 대책, 복지 정책의 틀에서 벗어나 사회적, 거시경제적 투자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 ‘저출산’이란 용어부터 ‘저출생’으로 바꿨으면 한다. 여성들에게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다그치지 말자. 왜 아이가 적게 태어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출산과 육아가 오롯이 엄마의 몫인 현실에서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강요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다.

아이를 낳아야 행복한 게 아니다.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더 가진다. 걱정 없이 결혼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도록 고용, 주거, 보육, 교육, 여가 등의 정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

원래 제목을 ‘아이 낳은 걸 후회한다’로 쓰려고 했다. 밤늦게까지 우는 아이와 씨름한 뒤 쓴 초안은 분노로 거칠었다. 하지만 출근길에 배꼽인사로 배웅하는 녀석들 때문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 웃음에 속아서 오늘 하루도 버틴다.
 
김재영 경제부 기자 redfoot@donga.com
#임신은 벼슬이다#대한민국 출산지도#저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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