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아베의 ‘겐세이 외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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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미국은 견제하고, 중국은 애를 태우며, 남조선은 가지고 논다. 이것이 장군님 외교의 특징이다.” 북핵 6자회담이 한창 가동되던 2000년대 중반, 북한 노동당은 내부 강연을 통해 김정일의 외교 전략을 이렇게 선전했다고 한다. 이런 북한의 주장에선 주변국을 보는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강연에선 아예 거론 대상에 끼지도 못한 일본에 대해선 어땠을까.

당시 6자회담 북한 대표는 일본을 두고 “그저 미국만 따라가는 정치적 난쟁이는 상대할 필요도 없다”고 아예 무시했다. 북한만 그렇게 본 것은 아니었다. 6자회담 내내 일본인 납북자 문제에 집착하는 일본을 향해 한국 대표마저 “납치 문제로 6자회담을 납치하지 말라”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납치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렸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문제는 아베 신조 정권의 가장 중요한 최우선 해결 과제다. 그도 그럴 것이 별 존재감이 없던 세습정치인 아베를 일약 보수우파의 스타로 만들어준 게 바로 납치 문제였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2002년 평양을 전격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깜짝 선물을 안겨줬다.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까지 한 것이다. 이는 김대중(DJ) 대통령의 훈수에 따른 것이었다. DJ 특사로 방북한 임동원 대통령특보는 김정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납치 문제는 지난날 극렬 맹동분자들이 저지른 소행이라는 정도로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하면서 조속히 귀환조치를 취하는 게 좋겠다는 게 김 대통령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김정일의 사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역풍을 불러왔다. 일본 국민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고, 당시 고이즈미 방북을 수행한 아베의 강경한 대북 자세에는 찬사가 이어졌다. 아베는 식민지배의 ‘가해자’ 일본을 하루아침에 납치만행의 ‘피해자’로 변신시킨 주역이었다. 이후 그는 강력한 대북 압박으로 북핵과 납치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아베에게 최근 한반도 정세의 급변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자신과 관련한 사학 스캔들이 잇달아 터지는 와중에 대북 외교의 ‘일본 실종(저팬 패싱)’에다 미국발 철강관세 펀치까지 맞았으니 절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배신감마저 느꼈을지 모른다. 결국 아베는 서둘러 미국행을 추진했고, 다음 주 트럼프를 만나 납치 문제를 북-미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로 삼도록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런 아베의 행보는 6자회담 당시 ‘성가신 존재’였던 일본의 행태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새롭게 변화하는 정세에 주도적인 대북 외교로 적극 대처하기는커녕 다시 미국에 기대 어떻게든 자신의 과업인 납치 문제를 비핵화 외교에 얹어 보겠다는 ‘도돌이표 외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의 시간은 여전히 2002년에 멈춰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일본이 담당해야 할 역할은 따로 있다. 혹시라도 미국이 완전한 북핵 폐기 대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포기에 타협하거나 평화협정 체결을 명목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면 유사시 최일선의 위협은 고스란히 일본이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일본은 이런 의심스러운 거래를 막는 견제자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납치 문제 해결의 기회도 온다.

일본말 겐세이는 한자어 ‘牽制’를 일본식으로 읽은, 말 그대로 견제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훼방이나 어깃장 놓기 같은 부정적 뉘앙스가 다분한 비속어가 됐다. 일본이 ‘겐세이 외교’나 하는 신세로 전락할 것인지, 아베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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