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장원재]윤동주의 부끄러움 받아든 일본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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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도쿄 특파원
장원재 도쿄 특파원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 유학을 떠난 것은 1942년 3월이었다. 당시 유학을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윤(尹) 씨’는 ‘히라누마(平沼) 군(君)’이 됐다. 개명을 닷새 앞두고 ‘참회록’이라는 시를 썼다. 이후 유학 시절을 관통한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교토(京都) 도시샤대 학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 씨는 우연히 둘만 수업을 듣게 됐을 때 윤 시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둘밖에 없는데 틀리면 부끄럽겠네요”라고 말했다고 했다.

‘히라누마 군’이 한국에서 ‘국민시인’이 된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기타지마 씨는 전후 50년을 맞아 KBS와 함께 윤동주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NHK 제작진에 옛날 학창 시절 앨범을 찾아 윤 시인의 생전 마지막 사진을 제공했다. 1943년 우지(宇治) 강의 한 다리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윤 시인은 중앙, 여학생들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수줍음이 많아 수업시간이면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수업을 듣던 그였다. 징병을 피해 귀국을 결심한 그를 위해 학우들이 열어준 송별회였던지라 당당하게(?) 중앙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사진을 찍고 1, 2개월 후 윤 시인은 일본 경찰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일본 남학우들도 대부분 전선으로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마지막 사진에 얽힌 사연이 알려지면서 우지에선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자는 자발적인 움직임이 생겼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의 곤타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이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는 윤 시인을 만난 후 인생이 바뀌었다. 2002년부터 매년 시를 읽고 꽃을 강에 던지는 추모 행사를 열었고, 2005년 기념비 건립을 위한 시민단체를 조직했다. 각계의 모금을 받아 2007년 기념비를 만든 후에는 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자치단체를 돌아다녔다. 2009년에는 6358명의 서명을 받아 교토 부(府) 지사에게 제출했다.

곤타니 사무국장의 바람은 지난해 우지 시 시즈가와(志津川) 구에서 용지 제공을 결정하며 이뤄지게 됐다. 주민 110가구의 작은 자치단체지만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됐으면 좋겠다”(구청장)며 기념비 건립을 받아들였다. 10월까지 건립될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에는 한국과 일본의 화강암에 양국 언어로 시 ‘새로운 길’이 새겨진다. 그리고 시인을 상징하는 돌기둥이 그 위에서 양국을 연결하는 디자인이다.

얼마 전 기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드디어 우지 강변에 기념비가 세워진다는 기사를 썼다. 여러 독자들이 ‘기사를 잘 봤다’며 연락해 왔다.

이번 비석은 일본 내에서 3번째다. 윤 시인을 기리는 일본 시민들은 매년 2월이 되면 시인이 유학했던 도쿄(東京) 릿쿄대와 교토 도시샤대, 숨을 거둔 후쿠오카(福岡) 등에서 추모 행사를 연다. 일본인 중에는 중국에서 시인의 무덤을 찾아낸 학자도, 30년 넘게 일본 내 행적을 추적한 전직 언론인도 있다. 모두 시인의 ‘부끄러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이들이다.

곤타니 사무국장은 기자에게 보낸 e메일에서 “현재 한일 관계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시민들은 윤동주를 통해 이어질 수 있다”며 “개막식에 꼭 와 달라”고 초청했다.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가 12년 동안 한국 시인 기념비 설립을 추진했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마음에 기자는 그 자리에서 ‘당연히 가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윤동주 시인#히라누마 군#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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